매일신문

향토체육의 맥129-육상9-전쟁기 경북육상 황금시대

전쟁기간동안 경북육상은 다른 지역에 비해 육상발전의 호기를 맞았다.피난온 현역 육상선수 대부분이 대구에 자리를잡았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훈련도 이뤄졌다.왜관 하양 경주 포항 등 이들이 연습을 하며 지나는 곳마다 육상을 배우려는학생들이 줄을 이었고 육상붐이 일었다.

헬싱키올림픽을 1년 앞둔 51년 5월.

대구에 있던 대표선수들의 체계적인 훈련이 시급한 과제로 제기됐다.수차례의 논의를 거친 끝에 손기정씨를 감독으로 코치에는 박만태(단거리)서윤복(장거리)이 발탁돼 당시 하양체육회 부회장이었던 이경철씨의 집에서 합숙훈련이 시작됐다.

선수로는 장거리에 함기용 송길윤 홍종호 등이었고 단거리에는 엄팔용 이이재 김정한 등이 훈련에 참가했다.

5월5일 이들을 환영하는 운동회가 하양서 열려 선수들의 시범경기도 있어 인근 주민들이 들끓는 등 관심이 높았지만 선수단의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6일부터는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갔지만 많은 선수들을 감당하기는 식량이 부족했던 것.

이경철씨는 "한달동안 집에서 밥을 해줬지만 중간에 쌀이 떨어져 군(군)에서특별원조를 여러번 받았습니다. 이후 경주 포항 등으로 합숙장소를 옮겨다니며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그 때문에 경북육상이 한단계 발전할수 있었지요"라고회고했다.

전쟁의 포화가 거의 가라앉은 53년7월 서울 배재운동장에서 전국춘계남녀중고육상경기대회가 열렸다.

여기서 막강진용을 갖춘 영남중과 영남고가 지방학교로는 처음으로 남자중고등부 종합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육상계에서 영남의 전성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

이대회에 참가한 영남선수들 대부분이 이후 국가대표로 활약한 것을 보면 당시 영남의 위세가 대단했음을 실감할 수 있다.

고등부에서는 김종식이 1백m와높이뛰기 세단뛰기에서 3관왕, 손경수(4백m)김명훈(1천5백m) 오문섭(5천m) 장환춘(멀리뛰기)등이 종목우승을 차지했고 이들을 주축으로 한 4백m계주와 1천6백m계주에서도 영남의 차지였다.종합득점에서 영남고는 98점을 따내 2위를 차지한 인천고와 60점이상의 차이를 내는 놀라운 성적으로 우승했다. (각종목 1위부터 6위까지 6~1점 득점)영남중 멤버도 그에 못지 않은 강자들로 영남고 선수들의 뒤를 이어 한국육상을 대표한 선수들.

1백m와 투창에서 우승한 황대구를 비롯, 8백m와 1천5백m를 석권한 지상욱 이인규(4백m) 김영수(높이뛰기) 박재근(멀리뛰기) 등이 정상에 올랐다.영남의 전성기는 전쟁전부터 예고됐다.

학교설립직후 교기로 출범한 영남육상은 1949년 4월 벌어진 제2회 대구-영천간 역전경주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장거리 강자로 부상했다.이때까지 지역육상은 대륜과 계성이 정상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상황.

특히 대륜은 단거리에서 엄팔용을 중심으로 전국무대에서도 강자로 군림하고있었다.

제1회 대회에서 우승한 대륜은강석윤 박태규 성칠봉 등 호화멤버를 자랑하며 참가 12개팀 가운데 단연 우승후보 1순위.

그러나 김명훈 박덕문 서병태 정수원 등 신예들을 주축으로 한 영남이 대륜계성 경북도청 등 강호들을 물리치고 1위로 골인하면서 지역육상에 일대 변화의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

영남고 주덕근교장이 육상에 보인 관심은 남다른 것이었다.육상부에 대한 지원을아끼지 않은 것은 물론 1951년부터는 경북육상연맹회장을 맡아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1954년에는 하양중에서 육상부를 지도하던 이경철씨를 코치로 영입, 훈련과선수스카우트를 일임해 영남장기독주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씨는 산발적으로 활동하던 경북각지의 육상팀에 자신감을 불러 경북육상저변확대의 실마리를 만든 장본인.

이때까지 고향인 하양에 머물던 이경철씨는 1953년 하양중에서 육상부를 창설,장거리선수지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씨의 집중지도를 받은 하양중 선수들은 1년만인 이듬해 11월 제1회 대구~경주간 역전경주대회에 출전, 영남중과 각축을 벌인끝에 우승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역전경주대회에 얽힌 얘기.

전국무대를 휘어잡던 영남중과 신설학교인 하양중의 레이스는 치열하기 이를데 없었고 응원또한 대단했다.

하양중은 경기첫날 코치 이경철씨가 하양구간 심판으로 뽑혀간데다 경험도적어 영남중과 큰 격차를 보였다.

이에 이경철씨는 구간심판도 팽개치고 인근 민가에서 빌려탄 자전거로 선수단을 향해 달려갔다.

이씨는 "가물가물 멀어진 영남중 선수와 트럭까지 동원한 응원단을 바라보면서도 선수들을 독려했습니다. 자전거뼈대가 부서질 정도로 애를 쓴 결과 영천구간에서 마침내 영남중을 따라잡을 수 있었습니다"라고 당시를 떠올렸다.경주까지 가는 동안에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대접전을 펼친 끝에 하양중이극적으로 우승을 안았다.

하양중이 영남중과 선두다툼을벌인다는 소식을 들은 대구의 하양 통학생들은 여관비도 없어 초가집에 묵고 있는 하양중 선수들을 찾아와 격려하는 한편급히 응원단을 구성하는 열의를 보였다.

하양중의 이 대회 우승이 계기가 돼 경북의 무산중 진량중 등도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강호로 떠오르면서 우수한 선수들을 속속 배출했다.전쟁기간 동안 대표선수들의 합숙으로 기초를 내린 경북 각지의 육상은 각종역전경주를 통해 발전을 거듭, 대구육상과 어깨를 겨룰 정도에 이를수 있었다.〈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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