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유학)의 한 갈래인 성리학을 국학으로 삼은 조선은 개국초부터 문은 본업, 농·공·상은 말업으로 삼았기 때문에 선비는 굶어죽어도 글을 읽어야 한다는 편향적 사고가 지배적이었다.그러나 임진·병자양란을 겪은조선후기, 중세 해체기에 들어서면서 몰락한양반계급이 증가, 어쩔 수 없이 농공상에 종사하는 반상계급(사)이 출현하게되지만 개국이래 300년간 이어온편협된 사고는 사회 전반적으로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원시유학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난 당대의 성리학을 배격하고 새로운 부국강병책으로 국가사회를 개혁 하겠다고 나선 실학자들도 실제 말업(말업)을 체험하고글을 쓰는 사람은 드물었다. 대부분 벼슬을 하면서 개혁론을주창했거나 관직생활을 하다가 낙향 후 저술에 몰두 했을 뿐이었다.실학 선구자들의 뒤를 이어 경세치용학(경세치용학)이란 본격적인 학파를 이룬 성호(성호), 이익(이익)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농포자(농포자) 정상기(정상기) 는 애초부터 관직생활을 포기하고 백성들의 생활 구석구석을직접경험해 우리나라 최초로 축척지도(축척지도) '동국지도'(동국지도)를 만들고, 구체적이고 독창적인 개혁론이 담긴 '농포문답'(농포문답)을저술 했다.
하동(하동) 정씨 정인지(정인지) 후손으로 태어난 농포자는 '백성에 이로운것이면 무엇이든지 연구한다'는 학문 자세로 치민(치민)에서부터 정치, 경제,의약, 무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전국을 실제로 답사, 실측지도를 만들었다.
100리를 한 자(척)로 10리를 한 치(촌)로 표시하여 지역의 넓고 좁음, 도로의 멀고가까움을 실제와틀림이 없이 한 동국지도는 여덟폭으로 만들어졌는데이를 합치면 전국 8도의전도(전도)가 되도록 꾸며 이용하기 편리하게 만들었다.
또 수륙교통로 통신망의 표현과 산맥의 표시를 명확하게 했으며 시각적 효과를 고려해도별채색을 한 것 또한 특기 할 만한 것이었다.
농포자의 '동국지도'가 나오기 전까지의 우리나라의 지도는 실제의 크기와는관계가 없이 산천·강이 넓거나 도읍지가 커 기록 할 것이 많은 지역은 도면을크게 잡는등 들쑥날쑥 이어서 실제 10리가 어떤 지역에선 30리가 되도록 표시되어 있는 등 이용하기에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농포자가 제작한 동국지도에 대해 이익(이익)은 성호사설(성호사설)에서 "정상기가 처음으로 백리척을 축척으로써 지도를 그렸고 가장 정확하다"고 찬탄했으며, 영조때의 지리학자 신경준(신경준)도 "'척량촌탁'(척량촌탁)에 의한 정밀지도는 정상기가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하고 이 지도를 바탕으로 국책사업으로 '동국여지도'(동국여지도)를 만들어 왕에게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국여지도 발문)
또 하나 주목되는 점은 농포자의 아들과 손자 역시 지도제작에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아들 항령(항령)이 '동국지도'를 수정 보충하고, 항령의 아들 원림(원림)이정조때 왕의 특명으로 '여지고'(여지고)를 수보(수보)해 삼대(삼대)에 걸쳐 지도제작에 공헌했다.
한국과학사상사를 연구하는 박성래교수(한국외국어대학)는 "정상기의 지도는우리나라를 상당히 사실적으로 나타낸 첫 지도로 40만분의 1지도라 할 수 있다. 그 후 1세기 후 김정호(김정호)가 16만분의 1지도인 대동여지도(대동여지도)를 만들어 지도의 정확도를 높였다"고 말해 김정호의 지도가 정상기의 실학정신을 이어 받았음을 강조했다.
농포자는 '동국지도'와 함께 그의 개혁사상을 엿볼 수 있는 '농포문답(농포문답)' '인자비감'(인자비감) '심의설'(심의설) '도검편' '치군요람'(치군요람)등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현재 전하는 것은 '농포문답'뿐이어서아쉬운 점이 없지않다.
농자(농자;벼·보리등 농사를 짓는 사람)와 포자(포자;무우·배추등 채소를재배하는사람)의 문답형식으로 자기의 사상을 개진한 '농포문답'은 농지배분(균전지)에서부터 치민(치민), 치병(치병), 양역(양역), 과거(과거)제도, 병기(병기), 풍습(풍습)등 백성들의 일상생활과 관련이 깊은 일을 30여개의 항목으로 나눠 개선책을 제시하고 있는데 대부분 이익을 중심으로 한 경세치용학파의논리와 같으나 문답식으로 풀이함으로써 문제의 핵심을 전달하는 호소력을 한층 높인 장점이 있고 계몽적인 성격이 강한것이 특징이다.
당시대의 최대 관심사였던 토지분배에 대해서는 중국 진나라때 정전법(정전법)이 폐지됨에따라 토지분배의 형평이 깨어지고 빈부의 격차가 심해졌다고주장, 전국의 토지를 농사지을 사람의 수로 나눠 배정하고 그 이상의 땅은 사고 팔 수 없도록 금지해 농민들이 유리걸식하지 않도록 해야한다고 역설했다.또 당시 서로 엇갈리는 법령이 많아 아전들이 뇌물의 양에 따라 똑같은 죄라도 멋대로 오그리고 늘리는 폐단에 대해 "법이란 천하에 공평함을 기하려는 것인데 이처럼 가볍고 무거운 정도가 다르니 백성이 제대로 따르겠는가"고 반문하고, 사슴가죽같이 말랑하다는 뜻으로 '숙록피대전'(숙록피대전)이라 야유받던 당시의 복잡한 법령을 일관되게 하나로 통합할 것을 제안했다.문란한 과거제도의 폐단을 시정하기위해서는 각 고을 향시(향시)에서부터 마지막 등용문인 회시(회시)에 응시하기까지 다섯번 시험을 치르게 함으로써 실력이 없는 자는 아예 단념하도록 하는 한편, 시험감독관도 후보자를 40~50명뽑아 놓았다가 과거 당일 배정장소를 알려줌으로써 부정의 소지를 미리 없애자고 했다.
정상기는 이와 함께 정확한 인구통계의 중요성과 작성법을 논하는가 하면 고을 관리는 고을을 다스리는 능력을 보아 승진시킬 것과 의약의 발전과 보급을위해 팔도에서 훌륭한 의원을 뽑아 후대할 것을 제의하는등 다방면에 관심을보였으나 절주와 금연의 강조는 단연 독보적인 것이었다.
술이란 벼슬아치들의 경우 술때문에 직분을 소홀히해 관가일을 엉망이 되게하고 백성은 가산을 탕진하는 폐단이 많으나 모두가 좋아하기 때문에 관에서도어떤 조치를 내리지 않고 있다고 주장, 농사짓는 소를 보호하기위해 성안팎에고깃관(정육점)을 설치 규제하듯 고을마다 술청을 설치하자고 제안했다.그는 술청에서는 하루에 일정한 양만을 팔도록 하고 술이 꼭 필요한 결혼,회갑, 잔치나 장례식에는 관에서 특별히 허락을 받아 술을 빚도록 하면 술의해악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담배는 "먹어도 배고픔을 없애지 못할 뿐 아니라 간장에 해독을 주고정신을 흐리게 하는 백해무익한 것"이라며 담배를 경작하는 사람, 판매하는 사람을 극형에 처해서라도 금단을 하도록 해 국민보건을 지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서울 및 지방 일반가정에서 일어나는 화재의 반이상이 이 담뱃불 때문이라고 지적, 국가재산의 피해에도 담배의 해악이 크다고 강조했다.정상기의 이같은 적극적인 금단(금단)사상은 임진왜란 전후 이땅에 도입, 급속도로 확산돼가는 담배의 해악에 대한 당시 사회적 우려의 반영으로 볼 수 있으나 이 때문에 그는 우리나라 역사상에 기록된 최초의 금연운동가로 높이 평가되기도 한다.
정상기는 제자도 없이 조용히 살았기 때문에 실학적 업적에 비해 지금까지크게 주목을 받지 못해 아쉬움을 남긴다. 죽기 3년전 그의 아들이 임금의 시종이 된 탓에 첨지중추부사로 추은됐다.
정상기의 처가쪽 인척이었던 성호 이익은 그의 묘지명에 '근 30년간 나와 벗했는데 그가 세상을 하직 함으로써 한쪽 날개를 잃은듯하다'고 기록, 두 사람사이의 학문교류는 매우 밀접했던 것으로 짐작되나 그의 문인은 아닌듯 하다.〈최종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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