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실학-유암 홍만선-조선후기 농업기술 한국화 선도

조선후기 붕괴위기에 직면한 중세봉건체제를 대체해 새로운 국가·사회질서수립을 모색하던 실학자들에게 국가지도 이념을 새롭게 구축하고 정치, 경제,사회 각분야의 개혁안을 제시하는 것 못지않게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의식주를 곧바로 해결하는 문제 또한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16세기 이수광이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격인 '지봉유설'(지봉유설)을 써실학개척의 문을 연이래 이러한 과제는 농학·지리·의학등 각분야에서 꾸준히이어져와 18세기 홍만선(홍만선 1643~1715)에 이르러서는 서민생활의 종합지침서인 동시에 농업기술서(농서)인 '산림경제'(산림경제)가 나타나게 된다.풍산(풍산)홍씨 13세손으로 숙종때 예조참의를 지낸 주국(주국)의 큰 아들로서울서 태어난 유암(유암)만선은 23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30세때 아버지가당쟁에 몰려 파직되자, 벼슬길을 단념하고 당대의 문인으로 우리국문학발전에크게 기여한 사촌형 홍만종(홍만종)을 따르며 젊은 시절을 보내다 38살에 음보(음보)로 벼슬길에 나섰다.처음 사옹원봉사라는 말직자리를 얻어출사했으나 선치수령(선치수령)으로뽑힐 정도로 인망이 높아 내직으로 사복시를 지내고, 외직으론 합천 단양군수상주목사등을 거쳤지만 늦게 벼슬길에 나선데다 가문의 후광도 입지 못해 높은벼슬엔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유암은 향촌의 군수·목사시절의 경험을 살려 서민생활의 안내서인 '산림경제'를 저술함으로써 당시대 실학자로서 자기의 역할을 다했다.4권으로 된 '산림경제'는 총 16개항으로 나눠 집, 마루, 우물등 터잡는법 복거(복거)에서부터 건강한 식사법, 곡물 원예 과수재배법, 양잠 가축기르기, 식품저장과 요리, 구급법, 전염병 해충물리치는 법, 흉년때 기아를 면하는 구황법, 옷에 묻은 때를 빼는법등 당시 농촌생활에 필요한 내용을 총망라하고 있는데, 사대부나 양반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일반서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특징이다.

또 이책에는 새로운 작부 및 작물체계 변화에 따른 종전의 농서에는 보이지않던 이앙법, 시비법등이 소개되고 주택, 건강, 의료, 취미생활 안내까지 다양하게 서술하고 있어 당시 농가생활의 모습과 농업기술수준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홍만선의 '산림경제'가 나오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농서는 1655년신속(신숙)이 지은 '농가집성'(농가집성)이었다. 세종때 관찬(관찬)으로 펴낸우리나라 최초의 농서 '농사직설'(농사직설)에 '금양잡록'(금양잡록) '사시찬요초'(사시찬요초)의 두농서와 부록으로 '구황촬요'(구황촬요)를 합편한 이 책은 그중간에 수차례 증보되면서 종래 우리 실정과 거리가 있는 중국의 농사법소개 수준을 완전 탈피하고있어 농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나 18세기초부터급변하는 향촌사회의 경제구조 변천에는 맞지 않는 점이 많았다. 이에 홍만선은 '농가집성'을 토대로 당시대에 맞는 종합적인 농가경제서 '산림경제'를 저술했다.

이와함께 이 책은 각항목 앞에 글을 쓰는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어실사구시의 모범을 보였다.

경북대 농업경제학과 이호철교수는 "'농가집성'이 조선중기 농업기술의 결정판이라면 '산림경제'는 조선후기 농업기술변천과 농촌생활모습의 단초를 보여주는 농업경제사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책"이라고 설명하고 우리나라 식생활사, 생물학사,의학사, 약학사연구에도 참고가 된다고 말했다.이교수는 특히 이 책머리에 집, 마루, 방, 부엌, 우물, 울타리등을 세울때터를 잡는 방법을 기술하고 도면과 해설을 덧붙인 것은 종전 농서에서는 없었던 것으로 3백년전 당시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가부장제적(가부장제적) 씨족부락형성의 반영이라고 설명해 관심을 모은다.

홍만선은 저서를 '산림경제'밖에 남기지 않아 그의 사상적 변모는 알 수 없으나 '산림경제'의 서문과 그가 죽은지 3년후 이 책을 펴낸 사촌형 홍만종의발문을 미뤄 당시 경직된 주자학에 적극적으로 반기를 든 민본주의 경제학자로짐작된다.

유암은 책머리에 '산림경제'를 쓰게된 동기를 '옛사람이 꽃과 대나무를 알맞게 심고 새와 물고기를 적성에 맞게 기르는 것이 산림경제이다라고 하였는데,일찍부터 이말을 좋아했으므로 이것을 내 저술의 책명으로 삼는다'고 했다.옛사람은 바로 '홍길동전'을 쓴 허균이었다. 당시 이단시됐던 불교 양명학도교를 두루 수용, 주자학에 반기를 듦으로써 결국 역적으로 처형된 허균은 현실에 참여하면서도 일찍부터 은둔을 꿈꾸어 중국의 고전을 번역한 향촌농서'한정록'(한정록)을 지었다. 그런데 홍만선은 역적으로 죽었고 당파도 다른 허균의 '한정록'을 읽고 허균의 생각을 그리워하며 허균의 글에서 책이름을 따고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저서 '산림경제'도 '한정록'의 내용을 많이 인용하고목차를 모방했다는게 전문연구자들의 견해다.

또 홍만종은 산림경제 발문에서 '홍만선은 벼슬길에 있으면서도 늘 마음을물외(물외)에 있는 것 같았다'고 말해 그의 은둔자적 기질을 적시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산림경제'는 인쇄돼 보급되지않고 필사본으로 전해져 와우리나라 농업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은 주지 못했다고 한다.하지만 이 책은 그의 제자 유중림(유중림)이 증보판을 내고 이를 참고하여후대 서유구가 대저 '임원경제지'(임원경제지)를 펴내고, 조선의 요리서로 유명한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도 바로 이 책에서 음식 만드는 법을 뽑아 한글책으로 펴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세자빈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홍봉한)이 영의정을 지내는등 영·정조때 우의정, 좌의정, 대제학, 대사헌등을 잇따라 배출, 세도가문의 명성이 높았던 가문의 일원이었지만 당파에 가담않고 선비의 정신을 지켰던 만선의 묘소는선산이 있는 경기도 양주군 중양면 창리에 있으며 직계손 홍기철씨가 충남 논산군 노성면 호암리 장전에 살고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최종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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