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시론-대구의 대구(박호성·서강대교수 정치학)

대구참사가 또 잊혀져가고 있다.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이래 2년 3개월 동안 대략 7백명 정도의 아까운 목숨이 어처구니없는 대형사고로 이 세상을 떴다. 오로지 상대를 죽이기 위해 서로총질해대는 전쟁터에서도 이러한 희생자 수는 엄청난 손실로 기록될 것이다. 1개 대대를 넘어서는 인명피해가 아닌가. 이런 뜻에서 그들은 단순히 '목숨을잃었다'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몰살당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 거의 서너달에 한 건씩 이런 식의 대량참사가 줄을 이었다.-대형사고 "행진"-

물론 이런 사고는 전적으로 현 정부가 책임질 일은 아니다. 언젠가 김대통령이 '부실기업을 인수했다'고 한 지적은 그래서 나름대로 심금을 울리는 진실을담고 있는 말이라 할 수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왜 하필 현 정부 아래서만그 '부실기업'들이 줄초상 치르듯 '쓰러지고'있는가 하는 점이다. 운수가 나빠서인가, 아니면 말세처럼 '때'가 되어서인가.

'적당히'라는 말은 두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전통적인 동양식중용주의의 반영으로서 '지나침이 없다' 또는 '알맞다'라는 것을 뜻한다. 다른하나는 한국사회의 일상적 생활인습의 한 표현으로서 '대충대충' 또는 '아무렇게나'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근대 이후 특히 프랑스같은 곳에서 예술과 철학과 문화의 격조높은 사교장 구실을 했던 귀족부인들의 '살롱'이 우리나라에 와서는 '룸살롱'으로 전락하는 판이니 크게 놀랄 일은 아니긴 하지만, 해방이후지금까지의 한국 역사는바로 두번째 의미의 왜곡된 '적당히'가 지배해왔다고할 수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얼렁뚱땅', '후딱후딱','대강대강'의 정신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대충대충' 판쳐-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직접적으로는 이승만 정권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무엇보다 그는 친일파들을 부활시키고 이들을 다시 권력의 핵으로 떠오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해방을 맞아 철저히 세탁되어야 할 새 조국의 민족정기가 이번에는 바로 민족자신의 손에 의해 더럽혀지는 참담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요컨대 독립군이 서야 할 자리를 이들을 토벌하던 일본 관동군이 대신한 셈이었으니 우리 사회의 도덕적 황폐화는 어떤 지경이었겠는가. 요령주의, 기회주의, 적당주의가 만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자연스런 결과였다.그리고 30여년 동안의 군사통치가 그 뒤를 이었다. 비정상이 정상을 내몰고,불성실이 성실을 비웃었으며, 허위가 정직을 손가락질하는 세월이 계속되었다.외형적이고 무조건적인 성장제일주의는 급기야 우리들에게서 인간적 삶의 아름다움을 앗아가버렸다. 새의 울음소리가 사라지고 자동차의 경적소리만 우리를휘몰아쳤다. 나무 우거진 숲을 뒤엎고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 숲이 들어섰다.교통지옥, 교육지옥, 환경지옥에 절망하였다. 어쩌면 모두가 '집단적 만성피로증'환자가 되었을 터이다. 그래서 많은 국민들이 '개혁'을 외치는 김영삼 정부의 출범에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다시 맥빠져있다. 아니, 단순히 맥빠져 있는 상태가 아니라 "다음은 내 차례가 아닐까"하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다.

-선거에만 신경-

김대통령은 5월초 청와대에서 "세계가 우리를 달리 보고 있는데도 아직도 10년 내지 20년전의 낡은 사고를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며 "세계의 변화를모르는 사람들이 아직도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일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언급된 '그 사람들'가운데 김대통령 스스로가 포함되지 않기를 간곡히 희망할 뿐이다. 왜냐하면 이런 엄청난 사태가 다시 터졌는데도 사고의 정확한 원인규명은 커녕 국회조차 제대로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관심이 무슨수를 써서 이번 선거에 이길까 하는 데에만 쏠려 있다. 정작 국민의 아픔과 절망은 아랑곳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은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대구는 선거를 통해서든 어떤 식으로든지 반드시 대꾸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온 국민의 불만의 외침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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