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욱민주당대구시장후보는 야당생활만 40여년을 해온 '고집불통'으로 통한다. 자신은 평생을 살면서 종교, 정당, 단체등에 들어가면 중간에 한번도 그만둔 적이 없을 정도로 초지일관된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하고 있다. 이때문에 그는 주위나 가족들로 부터 가끔씩 미련하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그는 대구 야당인사로상당한 지명도를 갖고 있지만 시장공천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었다. 일찌감치 시장출마를 결심하고 공천을 신청했지만 연합공천설에 시달리기도 했다. 또 공천을 내락받고도 경기지사선출문제로 중앙당이 내분에 휩싸이는 바람에 추대대회 연기가 불가피해지는등 악재가 겹치기까지 했다.그는이때문에 이기택총재를 겨냥, "밥을 다지어 놓고 있었는데 공천문제가 꼬이는 바람에 찬밥이 됐다"며 서운한 감정을 표시하고 있다.학원재벌로 불리면서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신후보를 조명해본다.△성장과정·학창시절
신후보의 학창시절은 학창시절이라고 할것도 없는 고생의 연속이었다. 경북의성의 농가에서 2남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돈이 없어 국민학교를 4학년까지밖에 다니지못할 정도로 집안이 가난했다. 결국 시골 형편에 입을 하나 덜기위해 옮긴 강릉의 당숙집에서 국민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완고한 시골에서 기독교인이었던 모친영향으로 일찍부터 기독교신앙을 갖게 됐다.
어릴적 그는 동네어른들로 부터 고집불통이라는 이유로 '꼴백이'라고 불렸다.도무지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피웠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고집불통''왕고집'으로 불리는 것은 이때 만들어진 성격때문인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고학으로 서울에서 중학교를 마친 그는 대구사범학교 강습과에 진학했다. 이학교는 당시만해도 1년만 다니면 교사로 바로 취직을 할 수가 있어 가계와 동생의학업을 지원해야 했던 그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의 초임지는 황해도 신계군의 작은 국민학교였다.
해방과 동시에 고향에내려온 그는 대구국민학교교사로 일했다. 일제하에서우리 역사를 배우지 못한 그는 이때 청년동맹에 가입해 역사공부에 심취한 적이 있으나 좌익운동을 하던 동맹을 탈퇴해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 국민학교에서는 또 교장을 쫓아내는 과정에서 좌익동료교사와 어울리는 바람에 유치장신세를 지고 파면되기도 했다.
좌·우익 갈등이 심각했던 당시 그도 이래저래 피해를 본셈이다. 그는 이때이같은 일이 없었다면 평생 시골학교 교장으로 지냈을 것이라고 회고하고 있다.그의 학력중지난 75년 미국웨슬리대학에서 사회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이있다.그는 이학위를 그동안 쭉 사용해오다 최근에는 그자신 스스로 이학위를가짜학위라고 인정했다.
△협성재단설립
6·25당시 그는 경주 문화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전쟁고아를 돌보는 고아원을 세웠다. 그러나 전쟁중에 고아원이 불에 타면서 모든 것을 청산하고 대구로 왔다. 당시만 해도 고아원출신은 학교교육을 받을 수가 없어 학교를 세우기로 마음을 먹었다.
대구에서 마침 대명동 명덕로터리 부근 땅을 구입할 수 있어 고아원을 지었다.당시 학교를 짓는데 그는 편법을 사용했다. 고아원을 등기해 학교로 둔갑시켜 버린 것이다. 이과정에서 그는 미국원조 자금을 끌어들이는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렇게해서 설립된 학교가 협성재단의 전신인 협성상업학교다.학교는 많지만 학교시설이 빈약해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원성을 산 경우도 많고 학교를 재산형성수단으로 이용한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만만찮다.△정치입문
그의 정치입문은 해공신익희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 56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나선 신익희가 대구유세에서 유세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던 때 협성상업학교운동장을 사용하도록 했다. 또 집도 없으면서 낡은 지프를 한 대 갖고 있던 그가 유세용으로 차를 흔쾌히 내놓아 해공을 훨씬 더 가깝게 대할수 있었다.이렇게 야당과 인연을 맺은 그는 3공화국 시절인 63년 6대총선을 시작으로본격 정치에 뛰어들었다.
김영삼대통령과 그는 7대 총선에서부터 인연을 맺었다. 자신이 경영하던 금고에 당시 야당총재이던 김대통령의 상도동 집을담보로 잡고 돈을 대출했다압류하는등 13대 공천과 관련한 불화로 서로 등을 돌리고 있지만 야당때 맺은인연 때문인지 김대통령에 대한 관계회복에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다△가족관계와 가정생활
30대에 한차례 이혼한 경력이 있다. 이혼한 부인과는 장남과 차남이 있는데모두 학교교감, 여행사사장을 하고 있고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1남3녀는아직 공부를 하고 있는 막내아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출가하거나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현재의 부인과는 여행중에 우연히 만나게 됐다. 이혼을 하고 독신으로 있는그는 당시 처녀였던 현부인과 결혼했다. 후에 대구경찰서장을 지낸 장인은 당시 자식까지 있던 그와의 결혼을 극력 반대했으나 이를 막지는 못했다. 그는매사에 자식들에게 '곧고 올바르게 살아라'고 강조하고 있다.△재산형성관계
93년 국회의원 재산등록 당시 그는 대구국회의원으로는 드물게 재산문제로시달렸다. 당시 17억의 재산을 등록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1백70억이면 몰라도 너무 적게 신고했다며 실사를 요구했다. 학교재단 재산을 실사하기 위해중앙에서 실사단이 내려오기도 했으며 노후를 위해 20년전에 구입했던 울진의임야까지 땅투기로 의혹을 받았다. 현재 13개학교가 있는 협성재단의 재산은 1천억원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14대 전국구 공천헌금으로 10억원을 냈다고 밝히고 있는데 정치권에서는 돈에 대해선 무서운 면이 있다고 한다. 전국구헌금문제로 고정일형의원과 몸싸움까지 벌인것은 돈에 얽힌 그의 유명한 일화다.
△국회의원활동과 시장출마
지난 6대 총선때부터 국회의원에 출마한 그는 8대에 대구 남구에서 당선돼 1년반의 단명 국회의원을 한 것외에는 지역구 의원 경험은 없다. 그동안 남구와안동등을 옮겨다니면서 국회의원에 도전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곤 했다. 지역구국회의원을 향한 그의 이같은 집념 때문인지 이번 시장출마에 대해서도 주변의시선은 곱지만은 않다. 상당수 사람들은 시장출마와 함께 그가 민주당달서을지구당위원장을 맡은 것과관련해 시장선거이후의 포석이 아니냐고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시장선거를 통한 홍보를 통해 자신의 인지도를 높인후 내년총선에 출마하는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그는 이같은 시각에 대해 말도 안되는소리라고 발끈하고 있다. 달서구위원장을맡은 것은 이지역 조직책이 비어 있었고 시장출마를 위해 연락소가 필요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이상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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