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익. 치밀한 행정가 스타일이라기 보다 호탕하고 의리가 있는 정치인같은인상을 주는 인물이다.대구시장 재임시 한 음악회에 참석한후 지역 유지들과 두류타워 회전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겨 '2차'를 벌인 일화는 아직도 얘깃거리로 오르내리고 있다.공무원 말단인 서기보로 출발, 대구시장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겉으로 드러난이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엄청난 노력과 능력이 뒷받침됐다는 평가도 동시에 받고있다. 자민련에 입당,민선대구시장 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이의익후보의 55년 인생을 더듬어본다.
△성장과정·학창시절
어릴때부터 책읽기를 즐겨한 이의익은 경북중 2년때 '삼국지'를 읽다가 제갈공명이 전쟁에 앞서 촉 황제인 유선에게 올린 후출사표를 부친(이세영)이 읊는걸 들으며 가슴이 벅차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는 신의와 의협심을가진 사람으로 정의롭게 살아야겠다는 인생관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연안이 본관인 이의익은 1940년 5월 6일 경북 안동군 도산면 이일동 효자암에서 3남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효자암은 하늘이 손바닥만하게 보이는 산간오지이다.
부친은 월남 이상재선생이 세운 독립운동단체 신간회의 경북지부 대표로 만주, 상해, 서울 등지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는 늘 쫓겨다니는 아버지와 그때마다 주재소에 끌려가 매를 맞던 어머니를 눈물로 지켜보며 자랐다. 이미 5세때 신사(신사)에 돌을 던질만큼 반일사상이 강했다. 그는 쫓기는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골짜기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심우영 경북지사의 백부가 부친과 동지여서 심지사는 해가 바뀔때마다 잊지 않고 세배를 왔다고 한다.
학창시절 공부보다 싸움을 잘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그는 나이에 비해 조숙하고 활달한 편이었다. 남에게 질줄 모르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때문에 간혹 힘겨루기의 대상이 됐고, 덩치가 좋아서 친구나 선후배들도 그에게 잘 대들지 않았다고 한다. 공부는 열심히 한 편이 아니었지만 머리가 좋아 어릴때 배운 '소학' '대학'을 줄줄 외울 정도였다고 친구들은 회상한다.경북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 경복고교 1학년때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 역할을 했던 큰형(의석)을 따라 경북고로 전학했다(이의석씨는 경북도청에서 근무했다). 시집을 낼 정도로 감수성도 풍부했고 친구들과 보리밭을거닐며 사색한 시간들이 정서적으로 성장하는데 도움이 됐다고 한다.성균관대에 입학한 그는 학생운동에 관여하다 4·19에 연루돼 강제징집을 당하고 제대후 우석대 행정학과로 학교를 옮겼다. 그는 41세 때 성균관대 행정대학원을 졸업, 석사학위를 받았다.
△가족관계·가정생활
부인 곽정애씨(50)와 찬희(25·여) 한희(24) 남매를 두고 있다. 부인은 경북고 동기생인 곽동환씨(곽병원 부원장)의 여동생이다. 그가 국무총리실에 근무할때 정애씨는 숙명여대생으로 오빠와 함께 신촌에서 살고 있었다. 친구의 집에 자주 놀러가다 여동생과도 자연스레 가까워진 경우다.
그는 '올바르고 의롭게 살라'는 자녀관으로 아이들을 엄하게 키웠고, 대구시장 재직시에도 바쁜 시간을 쪼개 주말에 부인과 함께 영화를 즐길 정도로 가정적인 모습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친구를 좋아하고 의리를 소중히 여겼던 탓에 월급봉투를 집에 갖다준적이 거의 없었다. 고향에서 친척이 찾아오거나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을 보면박봉에도 개의치 않고 돈을 덥썩 주어보냈다. 부인은 월급이 예금통장으로 지급되고 나서야 현금을 쥐어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장인 곽예순씨(곽병원 원장)는 딸에게 "공무원의 부정은 아내의 책임이 크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돈에 대한 부담을 주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장인이생활비를 보태주고 신촌에 작은 가게를 마련해주기도 했다.구자춘 의원이 경북지사로 있을때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장인은 그의출마를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혼탁한 정치판에 뛰어들기보다 대학에 강의를 나가길 바랐다. 그는 "장인이 사회봉사에는 돈을 아끼지 않지만 선거자금으론 5원도 받은 적이 없다"며 "처가의 재력과 명성이 오히려 부담이 된다"고 말한다.
△공직생활
5·16이 막 끝날 즈음 공채시험에 합격, 경제기획원에서 서기보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서울대 법대에다 고시출신들이 즐비한 경쟁사회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그는 남다른 노력을 해야했고 전국 2등으로 사무관 시험에 합격했다.30대 중반에 서울시 통계과장에서 일약 인사과장, 총무과장으로 승진하는 등노른자위에만 발탁돼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구자춘 의원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게 아니냐는 후문이 나돌았다.
그가 대구시장까지 승진한데에도 구의원과 관련이 있는게 아니냐는 꼬리표가지금까지 따라다니고 있다. 그러나 그는 "통이 크고 추진력이 남다른 점이 구의원의 눈에 뜨인 것이며, 상사로 모신 구의원을 인간적으로 존경하고 있다"고말한다. 그가 무소속을 표명하다 자민련에 입당한데도 구의원의 권유가 작용했다.
공직생활에서 그가 가장 중요시한 것은 바로 낙후된 지역 개발이었다. 창원시장으로 농촌도시를 대단위 중화학기지로 만들고 마산시장으로 마산시의 협소한 항구기능의 확대를 위해 30만평을 매립, 도시발전의 기틀을 닦았다.92년 민자당 정책위원회 내무전문위원으로 파견 근무한 그는 대통령선거에기여한 공로로 93년 문민정부의 첫 대구시장으로 부임했다. '일하는 시장, 일하는 공무원'의 모습을 보여주고자했던 그는 부하직원에게 엄했고 일이 잘못됐을 때는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다.
이같이 강한 모습은 '목이 너무 뻣뻣하다' '현실과 타협할줄 모른다'는 말을듣기도 한다. 그러나 농담으로 부하직원을 다독거려줄줄 알고 뒤끝이 없다는얘기도 듣는다.
지방행정은 '현장행정'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는 그는 새벽 일찍 일어나 지역을 구석구석 둘러본뒤 7시30분쯤 출근하는 일이 보통이었다. 비산염색공단 폐수처리장을 2배로 늘리도록 한 것도 그가 직접 현장을 살펴보고 추진한 사업이다. 삼성의 이건희회장을 만나 삼성자동차를 유치하는 길을 트고 중국 북경과섬유외교를 추진한 일 등도 스스로 삼는 공적이다.
그는 고속전철 대구구간 지상화를 반대한데 이어 동을보궐선거에서 민자당이패배한후 10개월의 대구시장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했다.그는 레게송도 부를만큼 노래실력이 좋고 술도 잘 마시지만 주사(주사)와 관련된 후문도 들린다. 기공식을 거창하게 열고, 시청앞에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를 설치해 예산 낭비가 아니냐는 시비를 낳는 등 내실보다 '과시용 행정'을 폈다는 지적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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