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전 어느날, 갑작스런 불의의 사고로 남편이 척추를 다쳐 대학병원 신경외과 병동에 입원하게 되면서 시작된 길고도 고통스런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나의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휠체어에 의존해 생활을 할뿐 단 한발자욱도 걸을 수 없는 지체 1급1호의 중증장애인. 멀쩡하던 가장이 어느날부터 영원히 걸을 수 없는 장애인이 되었을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만 같은 절망감으로 매일같이 눈물과 한숨으로 보냈던 지난 세월.
그때의 내 나이는 스물일곱, 그이는 서른셋이었다. 스물두살의 조금은 어린나이에 시집을 갔었기에 당시 남매를 출산해서 우리가족은 모두 네식구였다.남편은 대학을 나와 공직생활을 하면서 표창도 여러번 받고 진급도 한 성실한 직장인이었다. 우리부부는 아들딸 남매의 재롱속에 박봉으로나마 짜임새있게 가계부를 꾸려가며 파아란 희망을 가슴가득 안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의 질투인지 망망대해를 순탄하게 항해하던 배가 갑자기 불어닥친 거센 파도에 갈팡질팡하며 침몰위기에 처한 것처럼 남편의 사고는 우리가정을 한순간에 캄캄한 어둠속으로 몰아넣었다.
병원에 입원한 남편은 다른 환자들과는 달리 치유의 희망이 없을뿐만 아니라척추손상으로 하반신의 신경이 마비돼 욕창이 생겨 살이 푹푹 썩어들어가 욕창치료 때문에 이중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걸을 수가 없으니 남편의 화장실은 바로 침상위였다. 남편곁을 잠시도 떠날수가 없어서 당시 네살인 아들녀석은 친정부모에게 맡기고 두살인 딸은 큰 댁에 맡겼다. 우리의 행복한 보금자리였던 집은 큼직한 자물쇠만이 댕그러니 채워진채 풍우에 시달려 녹슬어 가고 있었다.
알콜소독 냄새가 하루종일 풍기는 신경외과 병동에서 온 몸에 깁스를 하고반듯이 누워 초점잃은 희멀건 눈동자로 천장만 바라보며 신음을 토하고 있는그이를 바라볼때는 스물일곱살 젊디젊은 나이에 무슨 팔자가 이런 팔자가 다있느냐싶은 생각에 기가 막히기도 하고 가슴이 천갈래 만갈래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하얀 시트를 갈아끼운지 불과 한나절도 되지 않아 설사를 하는 바람에 새것으로 다시 갈아끼울 때면 나무둥치처럼 깁스를 한 그이를 혼자 낑낑 이리저리옮기며 흙탕물처럼 뒤범벅이 돼버린 대변을 닦아내다가 비위가 약해 하마터면왈칵 토해버릴 뻔한 때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구토증을 가까스로 참고 정리를다 하고나면 언제나 등줄기엔 식은 땀이 흥건했다.
아이를 둘이나 키우며 똥, 오줌을 받아내는 데는 익숙했지만 정말이지 욕창으로 살썩는 냄새, 대소변냄새가 풍기는 그이의 침상은 정말 코를 쥐고 옆에앉아 있어야할 정도였다. 하지만그 냄새도 코에 배어그런지 어느정도 지나고나니 견딜만 했다.
1백여일동안 척추뼈가 아물어 붙을 때까지 천장만 보고 반듯이 누워 있어야만 하는 그이의 고통을 생각하니 너무도 불쌍하여 그이가 잠이 들어 있지 않을때는 항상 옆에 앉아서 책도 읽어주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주면서 그렇게 세월을 보내기 시작했다.
어느새 병실 창밖에는 단풍이 곱게 물들고 있었다. 그이가 불의의 사고만 당하지 않았더라면 주말에꼬마들의 손을 잡고 단풍놀이라도 갔을텐데 생각하니갑자기 병실이 숨막힐 것처럼 답답해져 왔다. 그리고 친정으로, 큰댁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는 꼬마들이 보고싶어 화장실로 달려가서 엉엉 소리내 울기도 했다.
그이는 일어나 앉을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걷지는 못하더라도 하루빨리 앉아보기라도 했으면 하는 것이 그이의 가장 큰 바람이었고 기다림이었다.
그이가 반듯이 누워있는 상태에서 계절은 또 겨울로 바뀌기 시작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겨울을 몰고 왔다. 거리엔 캐롤송이 울려 퍼지고 하얀 눈이송이송이 내리는 크리스마스 이브가 다가왔다.
어둠이 깔리는 병실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고있는데 똑똑 노크소리가 났다. 들어오세요라고 했더니 불우이웃돕기로 모은 성금을 가지고 목사님이 방문을 한 것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오셨다는 목사님의 안전모에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쓸쓸한 크리스마스이지만 따스한 온정이 흰 눈송이처럼 소복이 담긴 이웃들의 정성을 받고보니 다소 용기가 샘솟기 시작했다.
그 해가 저물고 새해가 돌아왔을때 그이는 깁스를 풀고 허리에 보조기를 차고 일어나 앉을수 있었다. "누워서 보는 세상과 앉아서 보는 세상이 이렇게다를 수가 있을까" 하며 그이는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휠체어를 한대 구입해서병원 운동장으로 산책도 나가고 환우들과 대화도 나누면서 그이는 점점 표정이밝아지기 시작했다.
얼마후 퇴원을 하여 뿔뿔이 흩어져 있던 꼬마들을 데리고 와서 정말 오랜만에 가족모두가 한이불 밑에서 함께 잠을 자니 감개무량했다. 이산가족을 상봉한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일까 하고 생각도 해봤다.
그 얼마후 우리 가족은 산좋고 물맑은 그이의 고향인 시골로 이사를 왔다.이사오던 날, 골목 어귀에서 차에서 내려 휠체어를 타고 집으로 갈때 동네 꼬마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가며 밀어주었고 우리집 꼬마들과도 단번에 친해져 우리를 흐뭇하게 해주었다.
먼-산에는 흰눈이 아직 녹지 않은채 희끄므레하게 쌓여져 있는 2월이었다.그이는 장지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고향의 산천초목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이사오던 날 밤 그이의 고향친구들이 찾아왔다.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고향에 잘 왔다고 했다. 그리고 내일은 친구들이 교대로 업어서 뒷동산과 앞산으로바람을 쏘여줄테니 술이나 조금 준비해두라고 했다.
닷새마다 한번씩 서는 시골장에 가서 호미며 괭이도 사고 삽도 샀다. 이농현상으로 오래 비워둔 빈집이라 그런지 손댈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풍우에 찌들린 장지문의 창호지부터 우선 산뜻하게 발랐다.
그다음 장날에는 예쁜벽지도 샀고 꽃이 그려져 있는 비닐 장판도 사왔다.동네 경운기에 싣고 돌아올 때 어서 빨리 집에 가서 벽지도 바르고 장판도 깔고 싶은데 그날은 경운기의 속도가 너무나 느린 것만 같았다.집에 돌아온 즉시 벽지를 바르기 시작했다. 그이도 벽지에 풀칠을 도와주었다. 비록 초라한 흙벽돌집이었지만 벽지를 산뜻하게 바르고 예쁜 장판도 깔고나니 마치 신혼방처럼 아늑하고 포근하기만 했다.
방을 훤하게 꾸며놓고 보니 이불이 때가 묻어 보기가 싫어서 이불호청을 전부 뜯어 개울가에 들고나가 깨끗하게 빨았다.
외벽에는 수성페인트를 사와 뽀얗게 바르고, 마당의 잡초도 뽑아내고, 마당한모퉁이에 텃밭을 만들어 비닐하우스속에 상추씨앗도 뿌렸다. 사과상자를 개조하여 토끼집을 만들어 토끼도 한 자웅을 사서 넣었더니 꼬마들은 부지런히토끼풀을 뜯어넣어 주며 즐거워했다. 얼마후 새끼토끼도 낳고하니 꼬마들은 너무나 신기한지 골목에 놀러나갈 생각도 잊어버린듯했다.
농번기가 다가오니 일손이 너무나 부족하여 농촌 일을 전혀 해본 적이 없는나에게도 부탁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뉴월 땡볕에 엎드려 마늘을 뽑는 작업부터 했는데 며칠을 뽑고나니 손가락이 마디마디 부풀어 터져서 고름이 고이고쓰리고 아파 고무장갑을 끼고 쌀을 씻어야만 했다. 그렇게 하여 나의 곱던 손은 점점 거칠어져 튼튼한 일손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모심기도 하고 새벽에 모판에 나가서 동틀때까지 무논에 엎드려 모를 찌기도했으며, 난생처음으로 이슬맞은 논두렁에 앉아서 꿀맛같은 아침밥을 먹기도 했다.
농촌일이란 땀과 먼지와 뒤범벅이 돼 일하기 때문에 사치란 생각할 수도 없고 오직 자연으로 돌아가는 기분으로 봄에 씨뿌리고 가을에 수확하는 보람으로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는데 만족을 느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한번은 과수원에 일을 나가 사과나무에 올라가서 접과를 하고 있는데 썩은가지를 잘못 밟는 바람에 아래로 떨어져 일주일동안 꼼짝도 못하고 방에 누워있었던 때도 있었다. 꼬마들을 아침을 먹여 학교에 보내야하는데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으니 큰일이었다.
그때 남편이 휠체어를 타고 부엌에 나가 밥도 짓고 국도 끓이고 계란도 부쳐아침밥을 먹인후 늦지않게 학교에 보내주었다. 아이들이 학교로 간후 그이는물을 끓여 소금을 넣어 타월로 찜질을 해주었다. 평생동안 남편의 보호자역할만 할 줄 알았는데 입장이 바뀌어 남편이 보호자역할을 하며 나의 허리와 팔,다리에 골고루 찜질을 하고 시원하게 주물러줄때 아,이것이 바로 부부의 정이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남편의 극진한 간호로 완쾌되어 다시 일터로 나갈때 나는 그이가 너무나 고맙고 믿음직스러워 넓직한 그이 가슴에 꼬옥 안긴채 눈물을 흘렸다. 결코 슬픔의 눈물이 아닌, 감사의 눈물이었다.
한동안 남편은 삶의 의욕을 잃고 방황했었다. 서른셋이란 한창 뻗어나가는줄기와 같은 나이에 척추를 다쳐 시들어버리고마니 자살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한지붕아래 한이불밑에서 남편은 매일같이 죽을 생각만 하고 있었고 나는매일 남편을 살릴 생각만 했다. 죽으려는 남편에게 진실한 사랑을 불어넣고 꿈과 희망을 심어주려 노력했다. 나의 피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어느날 그이는 긴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술도 끊고 텁수룩한 수염도 말끔히 깎고 용모를 단정하게 한다음 꼬마들의 학습지도도 해주고 방도 항상 깨끗하게 정리정돈 하면서 삶의 의욕을 보였다.별이 반짝이는 여름밤에는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밤하늘을 쳐다보면서 꼬마들은 별을 헤아리다 쌔근쌔근 잠이 들고 그이와 나는 별들만큼이나 무수한대화를 나누며 변함없는 사랑을 재확인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사소한 말다툼으로 잔잔한 가정불화는 가끔 있었으나 칼로물베기식으로 끝나곤 했다.
남자가 일정한 직업이 없으면 잔소리만 늘어나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게 돼그것이 바로 가정불화로 연결이 되니 남편이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길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손으로 할 수 있는 인장업을 권유했다.처음에는 꼬마들이 뒷동산에서주워온 꿀밤을 가지고 연습으로 도장을 새기는 것을 보았는데 여간 섬세하지않았다. 꼼꼼한 그이의 성격에 딱 맞는 직업이라고 여겨 얼마후 대구에 나가서 조각칼, 조각대, 인장재료, 서적 등을 구입해서 드렸더니 여간 좋아하지 않았다.
자기 마음에 들때까지 열번이고 스무번이고 사포에 갈고 또 갈아가면서 밤이새는 줄도 모르고 조각하는데만 열중하는 것이었다. 끈질긴 집념으로 1년여만에 한문으로 인감도장도거뜬히 조각을 해냈고 섬세한 법인대표자인까지도 매끈하게 조각을 했다. 그렇게 하여 서서히 재활의 꿈이 실현되기 시작했다.시골에서 7년여동안 열심히 남의 품삯일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읍내에 있는자그마한 연립주택을 한채 샀다.읍내로 이사를 오던 날, 정들었던 들판과 과수원 길을 몇번이나 뒤돌아보며 왔다.
읍내로 이사를 와서는 농공단지 공장에 취직을 했다. 그이는 그동안 갈고 닦은 인장(도장)실력을 발휘하여 인장업신고필증과 사업자등록증을 교부받아 조그마한 점포를 얻었다. 인장업신고필증을낼때 그이는 아들과 딸의 이름 첫자를 따옮겨 '민임사'라고 상호를 지어 신고를 했다. 비록 한발자국도 걸을 수는없지만 마지막 남은 두손으로 열심히 도장을 새겨 돈을 벌어서 자식들의 교육비에 보태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그렇게 상호를 지었다고 그이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을 했다.
인장업을 시작한지도 벌써 6년째. 주위사람들로부터 도장을 새기는 실력이수준급이라고 인정을 받고 있으며 단골손님도 많이 생겼고 전화로도 주문이 많이 들어와서 수입은 짭짤한 편이다.
나역시 공장의 생산현장에서 일하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모은 돈이 2천여만원된다. 거금은 아닐지라도 자식들의 교육비로 투자해 훌륭한 인재로 만들려고 생각하니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 걱정은 남편이 하반신 마비로 신경이 거의 죽은 상태라서 의자나 휠체어에 앉아서 도장을 새기면 엉덩이에 욕창이 생기므로 베개를 가슴에 받치고엎드려서 작업을 하기때문에 가슴이 아프고 답답해서 무척 고통스럽다는 말을들을때마다 마음이 찢어질듯 아파온다.
여하튼 지체 1급1호의중증장애인이면서도 재활의 꿈을 활짝 펼치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남편을 볼때 때로는 아내인 나자신은 사지가 멀쩡하면서도 남편에게 충분한 보필을 하지 못해 안쓰러울 때가 적지않다. 그이가 불굴의 투지로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볼때 나자신도 상당한 용기를 얻고 있으며, 남매들도더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다.
올해 아들녀석은 대학교에 입학했고 딸은 여고 2학년이 됐다.지난 2월에 아들이 대학교 등록을 할때 그이는 1백만원을 내놓으며 그동안먹고싶은것 먹지 않고 알뜰하게 모은 돈이라면서 등록금에 보태쓰라며 아들의어깨를 어루만져주며 격려해 주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나도모르게 손수건으로 눈물을 하염없이 찍어냈다.
그리고 아들에게 "아버지가 비록 중증장애인이기는 하지만 너희들을 위해 이렇게 최선을 다해가며 꿋꿋하게 사시는만큼 대학생활을 충실히 해서 형설의 공을 쌓도록 노력해라"고 목멘 음성으로 간곡한 부탁을 했다.이 세상에 태어나 마흔세살이 된 지금까지 우여곡절도 많이 겪었지만 지금까지 이렇게 정신력 하나로 버티며 공장의 생산현장에서 여공으로 열심히 일하고있는 것은 아이들의 가슴에 쓰러지지 않는 어머니의 상을 뿌리깊게 심어주고싶은 것이 나의 절대적인 결심이었고 장애인인 남편에게도 아내에 대한 믿음을심어줌으로써 공상과 잡념을 훌훌 털어버리고 재활자립을 할 수 있도록 기틀을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결혼식을 올릴때 주례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결혼한지 2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있다. '병이 들었을 때나 눈바람이 치고 비바람이때릴 때나 기쁠 때나 슬플때나 일심동체가 되어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때까지변치말고 행복하게 살아달라'는 그 말씀을 채찍으로 생각하며 살아왔다.하마터면 거센 풍랑을 만나 침몰해버렸을지도 몰랐을 이 가정을 다시 살리고옛날처럼 평온을 되찾은 것은 무엇보다도 남편의 강한 정신력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남편이 지금까지 아무런 직업이 없이 놀고만 있었다면 과연 어떠한 상황이 벌어졌을까를 생각해보니 장애인은 재활로 자립을 하는 것이 장애인본인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물심양면으로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고 가정을 화목하게 하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친정부모님들도 사위가 갑자기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 되었을 때는 상당한고심을 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사위가 재활로 자립을 하고 외손주도 최고학부에 입학을 하고 외손녀도 여고생으로서 품행이 단정하니 이제는 안심이 된다고하셨다.
한동안 좌절의 늪에서 헤매던 지난 날을 돌이켜볼때 그래도 우리 가정은 복받은 가정이라고 생각돼 앞으로 남은 인생도 더욱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돌아보면 언덕위 흙벽돌집 슬레이트 3칸은 나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를 담뿍심어주고도 남음이 있다. 봄이면 뒷동산에서 들려오는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여름이면 마당에 피워둔 모깃불의 풀향내를 음미하면서 흙과 더불어풋풋한 정을 피부로 느끼며 살아왔던 30대의 나의 삶은 결코 헛됨이 없는 알찬추억으로 배추속처럼 꼭꼭 내 가슴속에 들어차 있는 것만 같다.지나간 내 생일날 그이는 선물을 사서 휠체어 앞에 매달고 신나게 집으로 돌아왔다. 선물꾸러미를 풀어보니 예쁜 속옷이 들어있었다. 그 옆엔 짤막한 편지도 한장 놓여져 있었다.
'여보! 생일을 축하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짧은 편지였지만 그속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많은 뜻이 들어있었다.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우리 아기가 태어났어요]신세계병원 덕담
"하루 32톤 사용"…윤 전 대통령 관저 수돗물 논란, 진실은?
'이재명 선거법' 전원합의체, 이례적 속도에…민주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