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봉을 푸는 가장 간단한 해법은 '일'이다. 53년간을 살아온 그지만 복잡다단한 삶을 살아온 흔적을 발견키 어렵다. 항상 일과의 상관관계속에서 그의진면목은 나타났고 그것이 또한 내무관료 최대희망사항중 하나인 고향에서의수장자리에까지 이르는 소위 성공의 계단으로 맞닿아왔기때문이다.가정형편이 어렵던 고등학교,대학시절도 공부라는 목표와 행정가라는 꿈을위해 일을 해야만 했었고 불혹의 나이에마주서는 39세가 되어서야 이루어낸지각혼사 또한 일때문으로 설명되어진다. 결국 대구시장선거에 나선것도 "일을하고 싶어서"라는 것이 측근들의 얘기다. 좌절감 또한 일속에서 왔다. 89년대통령비서실내무담당비서관에서 국무총리 제3행정조정관으로 좌천된것과 대구시장부임후 2개월반만에 터진 페놀사태가 그랬다. 그가 어떻게 극복해 나갔을까.인생은 어쩌면 흥부의 이불같은것이다. 위를 덮으면 아래가 나오는....일에 몰두했던 그가 만든 가정생활은 어땠을까.그의 인생을 들여다본다.△성장과정·학창시절성주 이씨인 그는 42년 대구 중구 대신동에서 사법서사였던 부친 효용씨와청송심씨인 금애씨의 2남3녀중 막내로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달성군 옥포면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한것은 그가 네살되던 해 선친이 여기에 사시던 조부와 합가함에 따른것이라는 설명. 열네살되던 해에 대구중학교에 입학하면서대구로 이사,61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한다.그러나 아홉살되던 해 부친을 여의면서부터 가세가 기울어 고등학교 다닐때부터는 가정교사등으로 학비를스스로 조달해야만했다.
당시의 어려운 사정과 관련,고등학교 2학년시절 동기생이었던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장인 정정길교수는 "그는 과묵한편으로 겸손했지만 자존심이 강했다"며일화 하나를 전해준다. "당시 그는 공납금을 내지못해 3학년진학이 어렵게된 상황이라 급우들이 얼마씩 모아 공납금을 대납토록 했는데 해봉이가 교단앞으로나오더니 일장 연설을 통해 친구들의 우정은 고맙지만 스스로 일어서게마음으로 지원해 달라면서 그 돈을 거절했다"그의 그같은 자존심은 결국 서울법대진학을 1년 뒤늦게 만든다. 진학후에도 그의 일(가정교사)은 계속됐고 휴학-복학을 거듭한 6년의 대학생활을 마치고 고시를 준비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고된 일과는 결핵이란 병마와 조우케도 했다.그의 또다른 일면은 경북고재학중이던 60년 자유당독재에 항거한 2·28대구지역고등학교 학생의거에 선도적으로 참여한 점과 대학재학시 5·16군사정권에 의해 추진되던 한일밀실협상에 격분,소위 '6·3사태'에 참여,닭장차에 실려 청와대무술관에 끌려가 고초를 겪는등의 학생운동에 적극 나선데에서도 느껴진다.
그는 "어느날 시위에서 당시 서울대 총장이시던 권중희교수님이 시위대와 진압군의 중간에 깔려 넘어지는 순간 교수님을 감싸안고 넘어져 교수님은 무사했다"고 당시를 회고하면서 어쨌든 학생의 본분은 나라의 장래를 책임지는 꿈과실력을 키우는것이란점을 깨닫고 다시 학업에 전념케 된다.행정가가 되겠다는 꿈은 그가 국민학교시절 군수로부터 표창장을 받으면서부터 그전까지만 해도 선생님이 되겠다는 포부를 가졌지만 선생님조차 군수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보고는 이를 존경의 뜻으로 해석한 그는 행정관료가 되겠다고 굳게 자신과 약속한다.
△가족관계·가정생활
서울가정법원판사로 재직중인 경주이씨집안의 선희씨와의 사이에 국민학교6학년인 지훈,4학년인 승훈등 아들 둘을 두고있다. 두사람 모두 일때문에 결혼을 생각지 못하다 그가 39세되고 이판사가 32세되던해 법대동기로 검사를 지내던 친구의 소개로 만나 결혼에 이르게 된다. 우여곡절끝에 서울 화곡동 23평집에 전세를 얻었지만 당시 그가 저축해둔 돈은 겨우 1백50만원. 이판사가 그까닭을 묻자 그는 "다른 친구들은 결혼을 해 딸린 식구가 있고 나는 혼자여서같이 식사를 하거나 하면 혼자인내가 내는 것이 맞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독립운동으로 외곬인생을 살아온 아버지를 보면서 커온 이판사는 이점이 밉지가 않았다고.
일을 아는 사람들끼리의 맞벌이 생활은 불편한 점보다 서로 이해하는 부부애를 키웠다. 밤늦게까지 판결문을쓰는 아내를 같이 잠못자며 안쓰러워 지켜봐주고 아내는 남편의 늦은 귀가를 포용해줬다. 그러나 아이들은 달랐다. 아버지의 사랑을 그리워했다는 것. "엄마는 판사인데 왜 바보같이 일만 아는 아빠랑결혼했냐"고 투덜댈 때가 있었다고 이판사는 전한다. 그러나 아이들도 91년 글래디스태풍이 오던 당시의 사건을 전해들으면서 아빠를 이해하게 됐단다. 당시대구시장이었던 그는 여름휴가를 맞아 가족들과 경주에 갔으나 태풍이 오자 휴가를 취소하고 돌아와 관내순시에 나섰는데 동촌유원지를 돌때 미처 물난리를피하지 못한 한 남자가 전봇대에매달려 있더라는 것. 결국 구조했고 볼이 잔뜩 부어있던 아이들은 이같은 소식을 전해듣고는"아빠같은 공무원만 있으면우리나라가 잘 될텐데"라며 이해하는 눈치더라는것.
△공직생활
68년 제6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그는 80년 내무부 지방기획과장당시 대구를직할시로 승격시키는 한편으로 인근 6개읍면을 편입시키는 등 대구직할시창설작업에 핵심적인 역할을맡게 된다. 행정구역개편작업은 부동산투기때문에 정부의 최극비작업. 그의 책임하에 보안은 철저히 유지됐고 당시 서정화내무부장관과 김종호차관이 "직할시 승격시 단 한평의 땅도 편입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직할시를 설치하라"고 한 엄명에도 대구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구역확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장·차관을 설득,관철한다. "당시 같이직할시로 승격된 인천이 땅한평 늘림없이 그대로 승격된 점과 비교해 볼때 대구는 이해봉씨의 집념의 산물"이라고 대구직할시초대시장이던 정채진씨는 설명한다.
측근들은 이점과 함께그가 대구시장재임당시인 90년부터 부르짖어온 '대구위기론'도 그의 식견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위기론은 권력교체에 따라 이제는 보채도 떡줄 사람이 없다는 것으로 대구 스스로가 자생력을 가져야하며 이를 절감한 대구시민의 혁명적인 의식개혁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 요체.
그는 73년(내무부새마을기획담당),79년(〃새마을 기획과장),82년(〃새마을담당국장),86년(대통령비서실 새마을 담당비서관)등네차례 걸쳐 새마을관련 업무를 맡으면서 '하면 된다'는 발전욕구를 전 국민에게 불러 일으킨 드러나지않은 기획입안자였다. 국민정신운동에 따른 우리 국민의 정신적인 저력을 누구보다 믿게 된 것도 이때문이다. 박정희대통령의 독재와 장기집권에 대해 부정적인 면으로 보는 그로서도 경제발전에 관한한 '21세기의 박정희'가 되고자 낮밤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는 것.
일에 따른 정직한 평가에 만족하던 그에게도 좌절은 왔다. 5공에서 6공화국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면서 관례상 차관급인 시도지사로 영전되어야 할 5공청와대비서관으로 있던 그가 국무총리 3조정관으로 좌천된 것. 그러나 그는 이에 구애받지 않고 2년간 열심히 일했고 90년 12월 마침내 고향인 대구시장으로환향한다.
대구지하철기공,검단종합유통단지 건설기반마련,대구국제공항화 확정발표등1년 4개월간의 짧은 재임기간중 그가 행한 적지않은 일들은 그러나 취임후 2달반만에 터진 낙동강 페놀사건이란 두번째의 뜻하지 않은 재난속에서 그 평가가희석되는 고통을 당한다. 많은 주위사람들이 '그것은 시장영역밖의 인재'임을옹호해 주고 있음에도 사태발생 직후 기꺼이 책임을 도맡는 자세가 부족했다는일각의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그러나 그는 이같은 사태가 전화위복으로 작용,대구의 하수처리율을 35%에서 60%선으로 끌어올리는 등 수질개선을 6년이나앞당겼다고 자부하고있다. 역시 일로 극복했다는 것. 발탁인사도 그에게 따라붙는 구설의 하나. 또한 대구의 현 실정이 강한 이미지의 인물이 선두에 나서야 한다는 얘기가높고 종합행정차원의 대외적 측면도 중시되는 자리가 대구시장이란 점에서 다소 무색무취한 그의 특성이 회의감을 준다는 지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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