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북지사후보 인물조명-이의근 공직 35년 흠없는 모범생

민자당의 경북도지사후보인 이의근씨는 공직사회에서 모범생으로 통한다.시골군청의 말직에서 공무원생활을 시작, 청와대행정수석의 '화려한 날'에 이르기까지 좀체 흠결을 남기지않았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의 35년 공직생활을청렴성 성실성으로 요약하는 이가 많으며, '일이 있는 곳에 이의근이 있다'는평가가 따랐다. 그에게는 또한 오늘에 이르기까지 소위 '누구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있질 않다. 자신의 실력만으로 승진을 거듭하고 부서를 옮겨다녔기때문이다.△공직시작

이후보는 청구대 2년 재학중인 61년 봄 대구시에서 공직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학보병으로 1년6개월의 군생활을 마치고 복학을 한 신분이었다. 1백대1의 경쟁을 통해서였다. 가세가 기운 것도 한 요인이었지만 당시 민주당정권이인사혁신을 외치며 촉탁인사들을 쓸어내고 사상 첫 공채를 실시하는 매력에끌려서였다.

그 시절도 잠시,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현역 육군대령의 대구시장은 3년만기제대자외는 모조리 목을 날리는 무단조치를 단행했다. 학보병출신인 이후보도 당연히 그 대상이었다. 법적으로 대학재학생 입대자에게 혜택을 준 제도였지만 당시는 시장명령이 곧 법인 서슬퍼런 분위기였다.

여기에서 이후보는 잘 알려지지않은 일화를 갖고 있다. 그는 다른 동료직원처럼 순순히 사표를 내지않고 별명이 호랑이인 시장에게 대들었다. 시장실로찾아가 그 부당성에 대해 따졌다. 시장은 '새까만 쫄병이…'하며 흥분했다.시장손에서 서류뭉치가 날고 '총살 운운'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혼비백산한비서실장이 달려와 이후보를 끌어내며 구제를 약속했지만 그 길로 사표를 던졌다. 이 일은 당시 시청내에서 한참이나 화젯거리였다.

그는 그 해 곧바로 경북도 공채에 응시, 고향인 청도의 군청에서 다시 공무원생활을 시작했다.

△성장기

이후보는 38년 11월 7일 청도군 이서면 대곡리 364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이만호씨와 어머니 문순조씨 사이에 출생한 2남 4녀의 장남이었다. 지금의 대구시와 동남쪽 경계를 이루는 팔조령 자락의 산골마을에서 중농 정도의 농사를짓는 평범한 집안이었다. 그런 형편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조부의 영향으로 비교적 개화한 분위기였다. 트럼펫을 불 정도의 멋쟁이였던 부친은 늘 동네일에 앞장서길 좋아해 집안을 비우기 일쑤였다. 부친은늘 소년 의근에게 '사람있고 돈있다'고 일렀다. 재물보다 인간관계를 더 중시하라는말이었다.

이 마을도 6·25직전까지 '빨갱이'들의 출몰이 잦아 주민들이 고생을 한 곳이다. 이후보의 부친도 동네유지라는 점에서 늘 빨갱이들의 표적이었지만 인근마을출신인 빨갱이들은 부친의 뛰어난 설득력에 감복해 풀어주곤했다는 것이다.

그런 환경속에서 소년 의근은 농사일을 거들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업성적이 우수했던 그는 마을 뒷산에 올라가 곧잘 소나무를 군중삼아 연설을 하며꿈을 키우고는 했다. 오늘날 이후보가 친화력이 돋보이고 특유의 화술이 눈에띄는 것도 이런 영향과 노력 탓이다.

이서중학을 마친 소년 의근은 대구상고에 진학, 2학년까지 자취생활을 하다 대구로 이주한 가족과 합류했다.

△공직생활

청도군청에서 다시 공직의 길에 들어선 이후보는 3년만에 경북도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른바 발탁시험인소양고사에서 도내 전체 1등을 차지, 도청직원들의 선망의 부서인 지방과로 바로 들어갔다. 69년 그는 또 다시 내무부의소양고사를 통해 서울로 올라갔다. 여기서부터 이후보는성실한 근무자세와행정기획력을 인정받으며 부서배치와 승진에서 발탁에 발탁을 거듭 밟기 시작했다.

최근 청와대 생활을 마쳤지만 그는 이미 서기관시절인 78년 박정희대통령에 의해 청와대 차출근무를 한 바 있다. 단 두명의 내무부 파견 서기관중 한명으로서 당시 국정의 전체이다시피한 새마을사업 분야를 맡다 10·26을 맞았다.다시 내무부로 돌아온이후보는 내무부 3대핵심부서인 새마을지도과장,지방기획과장, 행정과장을 거친 뒤 경기도기획관리실장에 이어 부천시장에 부임했다. 그로서는 첫 일선지휘관 자리인 만큼 대단히 의욕적이었다한다.86년의 부천은 도시의 급팽창으로 수도사정이 말이 아니었다. 주부들의 물데모가 밤낮 이어졌다. 그는 이때 건설부와 경기도 실무진의 반대를 무릅쓰고성산대교밑의 한강물을 별도로 끌어쓰는대공사를 단행했다. 당시 70억원의예산이 드는 것 말고도 두려워하는 시청실무진들을 설득해 용단을 내린 일은그가 공직의 보람으로 기억하는 일중의 하나다.

이후 안양시장,내무부공보관,내무부지역경제국장,행정국장,기획관리실장을거쳐 고향의 도백으로 금의환향했다.

△가족관계

부인 이명숙여사와는 이후보가경북도청의 말직 근무시 이여사의 친구소개로 만났다. 청도 화양읍 출신의 이여사는 당시 청도국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만난지 6개월 후 결혼한 이여사는 이후보가 서울로 올라가면서 같이서울시내 국교로 전근해 22년간 맞벌이를 했다. 두 아들(현재 27,24세)의 어린시절은 노모가 돌보다시피했다. 그래서 그는 맞벌이 가정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다.

이후보는 지금도 30년 가까이혼자이신 팔순 노모(84)를 지극한 정성으로모신다. 매일 아침 온 가족이 모친 방에 모이도록해 문안인사를 드린 뒤 각자일과를 보도록 하며 효를 으뜸덕목으로 가르치고 있다.

△경북지사와 청와대시절

그는 신정부의 사정바람이 휘몰아치는93년 3월 경북지사에 부임, 투명한도정을 내세우며 나름대로 일처리를 엄정하게 하려 애썼다. 대구-안동 구간중앙고속도로의 공기 1년 단축 및 안동-영주간 조기착공, 구미-포항 산업고속도로와 포항 신항만개발의 타당성 조사 용역의뢰, 경북대에 농민후계자를 위한1년과정 대학원 개설 등은 그가 재임시 추진한 주요사업중 일부분이다.청와대 행정수석의 임명장을 받는 그날 그는 전국 15개 시도지사에 대한각 기관의 평가보고에서 항상 1위로 나타나더라는 대통령의 칭찬을 들었다. 청와대 생활은 새벽 5시에 집을 나서고 자정무렵 귀가가 다반사인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보람이 컸다. 그 자신 국정 최고봉의 자리에 참여한다는 행운과 함께평생 일해온 행정에 대한 또 다른 개안(개안)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기였다.대구고속전철의 지하화 성사와 경주경마장 유치에 깊숙이 관여한 일은 그가 청와대 시절의 보람중 하나로 여기는 '숨은 이야기'이다. 특히 경주경마장유치는 경제논리를 내세우는 마사회와 부산 경남출신 국회의원들의 로비가엄청난 가운데 매일신문관련보도를 수석회의에 돌리고 맨투맨 설득작업을 계속 펴 결국 대통령의 결심을 얻어낸 일이어서 보람이 크다는 것이다.이런 그에게도 부정적 평가는 따른다. 내무부에서 오래 같이 근무한 직원들 사이에는 '전천후'라는 별호로 통하기도 한다. 그만큼 윗사람 아랫사람 구분없이 두루 잘 지낸다는 의미도 갖지만 뚜렷한 자기주관없이 매사를 매끄럽게만 처리하려한다는 비난이다. 이와 함께 경북도지사 재임시 도민들이 기억할만한 업적을 별로 남기지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물론 그는 재임기간이 10개월에 불과했기때문이라고 해명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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