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판석, 그를 처음 만나본 사람들은 일단 차갑다는 인상을 받는다. 반면 그를 잘아는 사람들은 자상하고 너그럽다고 말한다. 차갑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이지적'이라는 말로 되받는다. 상반된 평가다. 도지사 시절 그를 '모셨던' 공무원들이나 함께 근무했던 공무원들은 그를 모시기가 쉽지않았다고 한다. 또윗사람들에게는 지나칠 만큼 잘하려고 했으나 아랫사람들에게는 매우 엄격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그의 야누스적인 두 얼굴중 어느 얼굴이 진짜 얼굴일까. 그에 대한 평가가이처럼 극과 극을 달리다 보니 그의 진면목을 드러내기가 쉽지않다. 다만 그가어려운 가정환경을 딛고일어나 자수성가한 인물이란 점에서 자기관리를 철저히 해왔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한다. 5급 서기(현재 9급)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차관급까지 오르려면 실력과 엄격한 자기관리외의 또다른 노력이 뒤따라야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않다. 그에 대한 탐험에 들어간다.◇성장과정·학창시절
이후보는 1934년 1월7일 지금은 칠곡군 가산면에 편입된 선산군 장천면 석우동에서 형제중 장남으로태어났다. 석우동이 행정적으로는 칠곡군에 편입됐지만 그는 아직도 선산 장천사람으로 생각한다. 집안어른들이 선산을 고집하는데다 선산(선산)이 선산에 있기 때문이다.
그의 부친은 소년 이판석이 국교에 입학하기 전 대구 동인동으로 솔가해 나왔다. 당시 집안형편은 비교적 괜찮았단다. 부친이 동인동에서 과수원을 경영해 먹고사는 데는 걱정이 없었던것으로 그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대구 수창국민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부친이신장병을 앓아 세상을 떠나면서 과수원마저 처분해야 했던 것이다. 수창국교시절 기억나는 친구로 그는 최재호 전대법관과 최세창 전국방장관 등을 들었다.국교시절 이후 그는 고단한 삶의 무게에 짓눌리며 세상살이를 체득해야 했다. 거친 세파를 혼자서 헤쳐나가야 했던 것이다. 수창국교를 졸업한 이판석은6년제이던 대구상중(현재 대구상고)에 입학한 뒤경북도청 사환으로 일했다.대구상고 주산대표선수였던 그에게 경북도청 회계과에 근무하던 친구 형님이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해 경북도와 관계를 맺었다. 다른 잡무도 도왔으나 곧 그만두었다. 발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경북도와의 인연이 이 때부터 시작된 것은 우연일까.
대구상고를 졸업한 뒤 영남대 상과에 진학했다. 대학에 진학하고서도 그의삶은 나아진 게 없었다.공사판을 전전해야 했고 가정교사생활을 통해 학비를해결할 수 밖에 없었다.
◇공직생활
58년 대학을 졸업한 이판석은 경북도가 실시한 5급 공무원시험에 응시해 무난히 합격한다. 이어 다시 4급 공채시험에 합격했으나 그의 보직은 그대로 5급서기였다. 당시는 자유당 정권의말기로 공무원의 인사체계 역시 말기적 증상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안동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그는 28세때인 61년 뒤늦게 군입대 통지를 받는다. 5·16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정권이 당시까지 병역을 마치지 않은 사람을모두 정리하면서 입영대상에 포함된것이다. 64년 제대한 그는 다시 안동에서 근무하게 된다. 안동에서 약 1년정도근무한 그는 곧 내무부로 발탁돼 서울로 올라가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다.그의 내무부 시절은 일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당시 3공화국은 정부가 경제개발의 견인차 역할을 도맡아 주도하던 시기였다. 자연 공무원들은 바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내무공무원들의 일거리는 특히 많았다. 이 때문에 그는 이 시절을 공무원생활중 가장 보람있었던시기로 꼽는데 주저하지않는다. 존경하는 인물도 박정희대통령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내무부의 지방기획·재정과장등 요직을 두루 거친 그는 80년대초부터 지방행정의 사령탑으로 일하게 된다.
80년대초 그는 지방 수령으로 나가면서 '체전 시장'이란 별명을 갖게된다.마산시장 재임시절 전국체전을 성공적으로 치른 공으로 다음 전국체전 예정지인 춘천시장으로 다시 발령받아 붙여진 것이다. 시장 재직시절 전별금을 챙겨가지 않고 불우이웃돕기와 직원들의 복지에 쓰도록 한 일화도 유명하다. 그 자신이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성장해 불우한 직원들의 복지에 관심이 많았던 탓이다. 이와 관련 그의 부인 김수희씨는 집안 친척으로부터 원망들은 얘기를 전한다. 마산시장자리에서 물러날 때 그는 쓰다남은 시장판공비와 전별금을 모두불우이웃돕기 창구에 기탁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한 친척은 "그 돈으로 집없는 나에게 집이나 한 채 마련해주지 왜 일가 피붙이도 아닌 사람들에게 선심을쓰느냐"며 그를 몰아붙였다고 한다. 그의 전별금 기탁관행은 경북도지사 이임때도 그대로 이어졌다. 전별금 2천8백여만원을 도청내 직원새마을금고에 넣어직원복지에 사용토록 한 것이다.
◇가족관계·재산형성
이판석은 군제대후 안동에서 근무하던 시절 부인 김수희씨(53)를 만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안동농촌지도소에근무하던 부인 김씨는 "친구 소개로 만났다"며 "첫인상이 자상했고 성실한 사람이어서 마음을 정했다"고 밝혔다. 슬하에는1남3녀를 두고 있다. 큰딸은 패션디자이너,둘째 딸은 수련의로 제 갈길을 가고있으며 셋째딸과 막내아들은 대학과 중학교에 다니고있다.한편 그는 지난번 공직자 재산공개때 23억여원을 등록, 구설수에 올랐다. 그는 서울 강남에 마련한 집 주변이 유명한 로데오거리로 변해 집값이 폭등한 탓이라고 해명한다. 이와 관련 그와 그의 부인은 "성실히 살아온 우리들에게 하느님이 내린 은혜"라고 강조한다.
◇경북지사 시절
이판석은 92년1월 '내무 공무원의 꽃'이라는 경북지사로 부임,1년2개월 동안재직했다. 그는 지사재임시절 많은 일을 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는 포항신항만 건설입안 경산학원도시화 입안 등을 주요 업적으로 내세우고 있다.그러나 그는 참모들의 말에 거의 귀를 기울이지 않은 도백으로 소문이 났다.이 때문에 모시기 어려운 지사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는 "부하들을덕으로 다스리지 못한 점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후회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경북도의회와의 관계도 불편한 정도를 넘어 상호불신에 가까울 정도였다. 92년가을에 열린 도의회 임시회에서는 병을 핑계로 본회의에 출석치않고 지역행사에 참석했다가 도의원들에게 알려져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또 그는 경북도 교육청과 경찰청 등 도단위 유관기관과의 협조관계도 원만치 못했다고 경북도청공무원들은 말한다. 그가 성실성등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도백으로서문제가 적지않다고 지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무튼 그는 오는 6·27선거를 통해 경북도민의 심판을 받는다. 민선 도지사로서 그가 어떤 그림을 그릴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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