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실학-성호 이익 하-'삼한정통론'주장'소중화'사관 탈피

성호(성호)는 삼국시대이래 중국을 종주국(종주국)으로 삼아 주변국 자리에머물러왔던 우리의 역사를 민족주체적 입장에서 삼한정통론(삼한정통론)을 전개, 중국중심의소중화주의(소중화주의)사관을 탈피하고,당시 서학(서학)을통해 수입되던 과학기술을 단순히 소개하는 수준에서 한 걸음 나아가 비판적으로 흡수함으로써 우리 역사와 과학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임진란에 뒤이어 명(명)나라가 망하고 조선이 지금껏 미개족으로 치부했던여진족의 청(청)나라가 중국대륙을 통일하고 조선을 침략(병자호란), 국왕이삼전도에 나아가 무릎을 꿇는 치욕을 당하자 야만족 청나라를 쳐 복수설치(복수설치)해야 한다는 게 성호가 살았던 당시 조선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정서였다.이에 따라 집권사대부층과 재야 사림(사림)들 사이에서는 대명의리론(대명의리론)과 북벌론(북벌론)이 활발하게 재기되고 자치(자치), 자강(자강)의 입장에서 우리의 역사를 다시 반추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물론 새로이 등장한 역사관은 당파와 개인의 시각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이나 대체로 대중화(대중화)의 정통을 이은 명나라가 망한 지금 대중화 다음으로 문명국가인 조선이 대중화의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고 주장, 민족자존의식을드높이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성호(성호)보다 14년 일찍 태어나 당시 집권층의 사론을 대표하던 유계(유계)는 그의 저서 '여사제강'(여사제강, 1667)에서 삼국시대의 사실을 비실제적인 것으로 폄하했지만 고려사의 본국기년(본국기년)을 중국기년보다 우위에 둬명나라 멸망후의 소중화적 자존의식을 표출했다.

유계와 동시대인으로 동사(동사, 1667)를 쓴 기호남인(기호남인) 허목(허목)은 우리고대사의 흐름을 기자 - 마한 - 신라의 단군 - 부여 - 고구려 - 백제의북방계와 기자 - 마한 -신라의 남방계로 분류, 대국(대국)인 단군, 기자, 위만, 고구려, 백제,신라는 세가(세가), 여타소국은 열전(열전)으로 다뤄 한국사에 있어서도 중국의 천자와 제후국 관계와 같은 독립된 역사질서체계가 가능한것임을 암시했다.

또 도학사가(도학사가) 북애(북애) 노인은 '계원사화'에서 과거 우리 민족의땅이었던 요동(요동)의 수복을 열망하는 서문에 이어 국조(국조) 환인(환인)의우주개창 신화가 서술된 조판기(조판기), 환웅이 동이족(동이족)사회를 건설해가는 태시기(태시기), 환웅의 아들이 임금이 된 후 단국(단국)을 이끌어가는단군기(단군기) 등 단군에 관한 기록을 풍부하게 기술, 민족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고양했다.

이와함께 홍여하(홍여하)는 '동국통감제강'(동국통감제강 1672) 임상덕(임상덕)은 '동사회강'(동사회강, 1711)을 저술해 우리민족사를 이(이)가 아닌 화(화)의 위치로 격상시켰다.

하지만 이같은 역사관들은 민족자존을 강조하기는 했으나 그 근본에 있어서는 조선개국 초부터 주(주)나라를 대국으로 신봉하던 화이론적(화이론적) 2분법에 의거하는 태도여서 중국중심의 세계관은 완전하게 탈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성호(성호)는 삼한정통론(삼한정통론)을 내세워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그의 삼한정통론은 기자조선이 중국계열의 위만조선에 망한 후 그 후손 기준(기준)이 남하,마한(마한) 진한(진한) 변한(변한)으로 분열된 한족(한족)을다시 뭉쳐 기자조선의 계통을 이었다고 보고, 이 과정이 요·순·우(요·순·우)로 이어지는 중국과 비슷해 우리 민족은 중국과 대등하게 자체의 독립된 역사를 지닌 것으로 파악했다.

'기준(기준)이 난리를 피하여 남하하여 마침내 마한(마한)을 칭하였다. 기준이 남쪽으로 내려간 뒤 위만조선이 조선 북쪽땅에 웅거하였으나 겨우 80여년만에 멸망했지만 마한은 오히려 1백17년이 더 오래 연장됐다.…마한이 백제에 땅을 빌려 주었는데 백제가 마한을 찬탈했으니 백제의 간계는 저 위만조선의 불의(불의)와 다름 없다.…그리고 백제가 마한을 멸망시킨 것이 왕망(왕망)이 한(한)을 찬역한 원년과 같으니 큰 나라와 작은 나라가 다름이 없다' (논삼한정통론)

그리고 '성호사설' 천지문(천지문)에서는 '오늘날 중국도 대지(대지)중의 일편토(일편토)에 지나지 않는다. 크게는 구주도 하나의 나라이지만 작게는 초(초)나 제(제)도 하나의 나라'이라고 말해 각국의 역사의 독자성을 인정, 근대적인 역사인식을 전개하는 한편 단군과 기자조선의 강역이 요서지방까지 미쳤다고 주장했다.

성호(성호)의 이같은 역사인식은 15세기부터 서학(서학)을 통해 이땅에 수입된 자연과학과 기술을 비판적으로 흡수 수용한 개방적 학문자세 때문이라는게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성호(성호)는 특히 자연과학에 관심을 가져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둥근지구의 상하표면에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은 지구가 만물을 끌고 있는 인력(인력)같은 것이 있기 때문으로 설명하고, 지구가 달보다 크고 태양이지구보다 크다는 사실, 비 눈 우뢰등 자연현상에 대해서도 비교적 과학적인 이해를 하고 있었다.

또 비단옷이나 고양이털을 마찰하면 어둠속에서 번쩍번쩍 불꽃이 일어나는현상을 설명해 우리나라서는 처음으로 저서에 전기를 기록한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다.

자연현상에 대해 한 그의 해박한 지식은 우리전통 기의 개념을 보다 구체화해 후대 홍대용(홍대용), 최한기(최한기)의 기학(기학)에 영향을 미치는 한편정신과 지각은 육체적 기관에 의존한다고 보고 외계에 대한 인식은 오관(오관)과 심에 의해서 생긴다고 말해 인식론에서도 진일보된 이론을 전개했다.퇴계(퇴계) 이황(이황)을 흠모해 그의 언행록인 '이자수어'(이자수어)를 펴내는가 하면 율곡(율곡)이이(이이)를 당대의 세무(세무)에 가장 밝은 사람이라고 평가, 불편부당한 학문자세를 가졌던 성호는 83세 되던해 조정으로부터첨지중추부사로 은전을 받았으나 그해 오랜 병고끝에 숨졌다.평생을 농촌에 묻혀 경세치용의학에 몰두하고 죽을땐 입던 옷으로 염을 하게해 근검절약의 모범을 보였던 성호의 후손으로는 직계손으로 이주형씨가 강원도에 살고 있으며 방계손으로 이돈형씨가 저지난해 성호의 영정을 비롯, 성호사설등 서책 70여점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 성호문고를 만들어 기리고 있다.〈최종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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