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망졸망한 초가와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한데 어우러져 때로는 고풍당당하고때로는 퇴락한 고가들이즐비한 동성촌락은 대체로 조선후기인 17세기에 생겨났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선임연구원 정진영씨는 역사비평 봄호에 게재한 '조선후기 동성촌락의 형성과 발달'이라는 글에서 산업사회로의 발전이 오늘날의촌락사회를 크게 변화시키듯, 이전 촌락의 변모 역시 사회경제적인 변화에 조응, 촌락구조만이 아니라 삶의 양식까지 바꾸는 사회변화와 직결된다고 밝혔다.
그는 풍산류씨의 동성마을로 유명한 경북 안동의 하회마을의 경우에서 동성촌락의 형성과정을 살폈다. 하회마을에 류씨가 처음 정착한 시기는 15세기초.이때는 류씨만이 아니라 흥해 배씨도 함께 이주하였다. 하회마을에는 류씨와배씨가 들어오기전에 허씨등이 살고 있었다. 이어서 류씨와 배씨의 사위와 외손인 안씨와 권씨등이 이주해오고, 반대로 류씨와 배씨의 아들들은 처향과 외향을 따라 옮겨가기도 함으로써 하회동의 성씨 출입은 빈번한 편이었다.17세기 초반에 작성된 '동안'에는 류씨 50%, 안씨 20%, 권씨 15%, 김 남 허노 이등의 성씨가 15%였으나 18세기 후반의 촌락문서에는 류씨가 절대다수이고타성은 극소수로 마을 구성이 상당히 달라졌다. 당시 서얼과 노비호수가 류씨호보다 많았으나 18~19세기 서얼과 노비의 이거와 도망이 보편화, 오늘날과 같은 적계중심의 전형적인 류씨 동성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동성촌락은 재산균분과 친외손 평등취급을 주로하던 가족제도가 적장자 중심의 종법적 가족질서로 재편되고, 특정성씨가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확보하면서촌락 주도권을 장악, 열등한 성씨를 점차 촌락사회에서 소외시키면서 정착돼갔다.
동성마을은 동성간의 결속과 하층농민을 지배하기 위해 '족계'와 '동계'라는장치를 마련, 자손들의 화합을 꾀했지만 상호간의 경제적 불균형과 적서간의신분적인 갈등을 안고 있었다.
18~19세기 양반은 내부의 경제적 분화와 정치적 분열,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른 하층민의 성장으로 더 이상 향촌사회를 지배하지 못했지만 몇몇 양반가문은이런 동성촌락을 통해 종전에 누렸던 제특권과 위세를 유지하거나 더욱 강화할수 있었다. 결국 동성촌락은 서얼의 도전과 하층민의 저항, 그리고 관의 부세수탈에서 직간접적인 대상이 되었던 현실에서 양반층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대응형태였던 셈이다.
〈최미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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