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향토체육의맥133-육상13-단거리스타 엄팔룡 6년간 "유아독주"

육상에서 단거리는 가장 박진감이 넘치는 종목이다.중장거리나 마라톤에 비해 짧은 거리를 짧은 시간에 달리기 때문에 육상경기장을 찾는 관중들의 시선은 자연히 단거리에 집중될수밖에 없다.구기종목이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던 1960년대까지 육상, 특히 단거리는 시민들의 가장큰 인기를 끌었고 정상급 선수들은 지금으로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명성을 날렸다.

해방이전 경북육상 단거리부문을 전국정상으로 끌어올린 서팔룡 최무룡 김목탁 이용학 표문철 등은 지역민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스타였다.해방후에도 사정은 마찬가지.

가장 먼저 떠오른 단거리스타는 엄팔룡이었다.

1947년 10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28회 전국체육대회.

전국대회에 첫 출전한 엄팔룡은 이때만 해도 덩치만 컸지 누가봐도 앳되기그지없는 무명의 대륜중학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400m에 출전, 52초3의 기록으로 1위를 차지하고 쟁쟁한 선배들과 함께 뛴 1,600m릴레이에서 경북팀우승을 이끈 주역이 되면서 일약 단거리계의 강자로 떠올랐다.

엄팔룡은 원래 축구부에서 골키퍼를 맡으며 교내에서 열리는 농구나 배구대회에도 출전하는 만능선수였다.

이런 그를 육상에 입문시킨 것은 당시 대륜고 교사였던 반기화씨.체조전공이었던 반씨는 엄팔룡의 주력을 보고 이내 배형규 등 체육교사들과 함께 그에게 육상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육상에 입문한 엄팔룡은 처음에는 학년별 대회에서 400m에도 출전하고 역전경주에도 참가하는 등 종목을 가리지 않고 달렸다.

천태화씨(현 경산대 육상감독)는 "역전경주에 참가,최단코스주자였던 그는마치 100m를 뛰듯 달렸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들어보니 이쯤이야 이쯤이야 하면서 달리는데 그렇게 멀수가 없더라는 겁니다. 그후 엄팔룡은 자신의 주종목을 단거리로 결정하고 새롭게 연습을 시작했다고 합니다"고 그를 기억했다.28회전국체전에서 2관왕이 된 후 엄팔룡은 출전하는 대회마다 단거리부문우승을 독식했다.

100m와 200m, 400m를 주종목으로 한 그는 참가하는 대부분의 대회를 휩쓸어지역대회건 전국대회건 엄팔룡이 모습을 보이는 종목은 누구든 그의 우승이라고 치부할 정도.

당시 엄팔룡이 누렸던인기는 가히 운동선수로는 최고여서 학년별대회나 시민운동회 등 그가 출전하는 대회마다 그를 보려는 관중들로 발디딜틈이 없을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주종목마다 한국기록을 경신해 나갔고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는 200m예선에서 4위에 그쳐 아깝게 탈락하고 말았지만 이때 그가 세운 21초5의 한국신기록은 오랫동안 깨지지 않는 벽이 됐다.

그러나 엄팔룡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 선수들은 그가 누린 명성과영광만큼이나 많았다.

대표적인 선수가 계성중의 이이재.

엄팔룡과 맞먹는 스피드를 갖춘 이이재였지만 엄팔룡과의 대결에서는 대부분 아슬아슬하게 패해 보는 이의 안타까움을 샀다.

불운했지만 이이재 역시 천재적인 스타였다.

33회 전국체전에서 100m와 200m우승을 차지한 그는 34회대회에서는 400m를제패, 제2회 마닐라 아시안게임에 200m대표로 참가하기도 한 것.엄팔룡이 그처럼 한국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었던 데는 이이재와 같은 훌륭한 라이벌이 있은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는게 주위의 분석이다.단거리에서 약6년동안 무적을 자랑하던엄팔룡도 탁월한 후배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한걸음 물러서게 된다.

선두주자는 영남고의 정기선(현대한육련 전무이사).

천안중에서 축구선수를 하던 정기선은 육상을 하기 위해 대구를 찾아 1954년 영남고에 입학, 황대구 손경수 등 쟁쟁한 단거리멤버들과 실력을 쌓아나갔다.

정기선이 1학년때 가졌던 엄팔룡과의 100m 첫 대결.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도 정기선은60m까지 앞자리를 뺏기지 않았으나80m를 지나며 엄팔룡에게 선두를 내줘 아깝게 패하고 말았다.당시 영남고 선배로 경기를 지켜본 천태화씨는 "엄팔룡을 꺾는 순간을 한껏 고대하던 선배들은 다투어 그에게 달려갔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마구 나무랐지요. 나중에 물어보니 하도 엄청난 선배여서 긴장이 돼 아차하는순간에 지고 말았다는 겁니다"고 회고했다.

이후 정기선은 100m와 200m에서 엄팔룡을 제치고 단거리최고선수로 떠올랐다.

특히 100m에서는 엄팔룡도 세우지 못했던 전국체전 5연패라는 대기록을 세웠고 200m와 400m릴레이 1,600m릴레이 등에도 참가, 매대회 평균 3~4개의 금메달을목에 걸었다.

정기선이 전성기에 세웠던 100m한국기록 10초3은 지금껏 깨지지 않고 있으니 당시 그의 스피드와 위세를 쉽게 짐작할수 있다.

한편 정기선이 등장한 후 엄팔룡은 허들로 종목을 전환했다.여기서도 그의 천재적인 운동신경은 빛났다.

1956년 37회전국체전110m허들 우승을 차지한 엄팔룡은 38회대회에서는110m와 400m허들 모두 대회신기록을 세우며 2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이후 현역에서 물러난 엄팔룡은 대구에서 전국체전이 열린 1962년 주위의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110m허들에 출전, 향토에 금메달을 안겨주는등 지금까지도 향토 최고의 육상스타로 남아있다.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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