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향토체육의 맥134-육상14-이창훈 아시안게임 마라톤 월계관

50년대 향토육상은 단거리 뿐만 아니라 중장거리 마라톤 필드 등 각 부문에서 발군의 스타들을 속속 배출했다.중장거리에서는 계성의 배희조도록창 대륜의 강석윤 영남의 이창훈 주형결등 강자들이 즐비했다.

특히 영남은 중장거리를 주축으로 한 팀이어서 천태화 지상욱 이상조 서병태박덕문 등 쟁쟁한 멤버들로 전국무대에서 꾸준한 강세를 유지했다.중거리대표주자인 배희조는 원래 성주농고 재학생이었다.

그의 실력은 금방 눈에 띄어 계성으로 스카우트돼 명성을 높여나갔고 마침내국가대표에 선발됐다. 1954년 마닐라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안게임 남자 1,500m경기. 입상은 못했지만 배희조의레이스는 한국팀에 첫 금메달을 안겨준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출발선에 나와있는 8명의 선수가운데 배희조 최윤칠 그리고 일본의 무로야등 3명이 강력한 우승후보.

출발신호와 함께 배희조는 총알처럼 달려나갔고 그를 따라잡으려는 무로야의페이스가 급격히 빨라졌다.

20여m뒤에서는 최윤칠이 자기속도를 유지하며 꾸준히 달리고 있었다. 너무일찍 스피드를 냈던 배희조는 두바퀴를 돌고 기권,무로야가 선두로 나섰으나이미 피로가 완연한 상태였다.

이때 최윤칠의 스피드가 빨라지며 무로야를 따라잡았고 마지막 스퍼트에서최윤칠은 마침내 결승테이프를 끊었다.

경기후 최윤칠은 "배희조가 선두로 나서자 제일 당황한 것은 무로야였습니다. 잡힐듯 잡힐듯 배희조는 선두를 뺏기지 않았고 화가난 무로야는 기어이 그를 앞질렀지만 오버페이스한 탓에 이미 스피드가 떨어진 상태였죠. 그덕에 우승이 훨씬 쉬워졌지요"라고 말했다.

마라톤의 이창훈은 향토육상이 낳은 최고의 선수중 한명으로 꼽힌다.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4위를 차지한 뒤 1958년 동경아시안게임 마라톤에서 우승한 주인공이 바로 그다.

성주선남출신의 이창훈은 영남중에 입학하면서 장거리에 입문, 뛰어난 자질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영남고로 진학하면서 이경철선생의 체계적 지도를 받은 그의 실력은 하루가다르게 늘어갔다. 특히 이경철선생의 집에서 정기선 지상욱 등과 함께 합숙동계훈련까지 거친 그는 이미 전국최강의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이듬해인 1955년5월 멜버른 올림픽 대표선발전에 나선 이창훈은 첫 완주를 시도했다.당연히 레이스는 어려웠고 서울운동장~오류동을 왕복하는 구간에서 이창훈은몇번을 쓰러졌다.

이경철씨는 "구간내내 그를 뒤따르며 그가 쓰러질때마다 물을 뿌려 일으켰습니다. 나중에는 물이 없어 오렌지주스까지 얼굴에 퍼부었고 마침내 2위로 골인했지요"라고 당시를 기억했다.

이때 1위는 보스턴마라톤에서 2위를 차지했던 송길윤선수.

그의 우승은 예상했던터라 주위의 관심은 송길윤보다 2위로 들어온 이창훈에게 집중됐다.

특히 당시 양정고에서후배들을 지도하던 손기정씨는 이창훈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고 양정고전학을 집요하게 권유, 영남고관계자들과 협의끝에 기어이스카우트를 성사시키는 열의를 보였다.

손기정씨의 지도아래 본격적인 마라톤연습에 들어간 이창훈은 1956년 멜버른올림픽에 참가, 4위에 입상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이창훈씨는 "날씨가 엄청나게 더워 중반을 넘기며 무척애를 먹었고 10km쯤 남았을때는 아예 물을 덮어써가며 달렸습니다. 골인지점을앞두고 계산해보니 앞에 달리는 일본선수만 제치면 3위라는 생각이 들었고 주위의 응원도 그랬지요. 안간힘을다해 일본선수를 제쳤는데 막상 골인하고 보니 4위여서 얼마나 허탈했는지 모릅니다"라고 술회했다.

세계무대에서 자신의 기량을 점검한 이창훈은 2년뒤 벌어진 동경아시안게임에 출전, 마침내 우승의 월계관을 차지했다.

제3회 아시안게임 6일째인 1958년 5월29일 동경국립경기장.8만여관중이 섭씨30도를 웃도는 땡볕아래 숨죽인채 대회의 꽃 마라톤골인장면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가장먼저 경기장에 들어선 선수는 한국의 이창훈.힘겹게 한걸음 한걸음 내딛던 그는 골인과 동시에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일제하 베를린올림픽에 출전,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신화가 다름아닌일본땅에서 재현되는 순간이었다.

이창훈의 후일담.

"불볕더위속에서 기록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38km지점을 통과하면서부터의식불명이 됐는데 마라톤만큼은기어이 일본선수를 이겨달라고 신신당부하던재일동포들의 얼굴이 또렷이 떠올랐습니다. 아예 걷는 정도가 되어서도 결승점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그덕분이었지요".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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