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분단되면서 한때 '38 무역'이라는 형태로 남쪽 쌀이 북한에 반출된것을 제외하고는 이후 70년 중반까지 쌀은 물론,남한 물자를 북한에 제공한경우는 드물다.이후 남한은 실제로 경제가 착실한 성장을 거듭하면서 자신감을 토대로 84년8월 전두환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남북한간 경제협력및 기술·물자 무상제공을제의했고 88년7월 노태우대통령은 '7·7선언'을 통해 남북교역 개방을 천명했다.
그러나 당시까지도 남북한 양측은 체제경쟁의 일환으로 쌀제공 제의를 한 것에 불과하며 정작 성사여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는게 대체적인 지적이다.그러나 84년 9월 남한의 수재를 돕겠다며 북한적십자사측이 쌀 7천t과 천 50만m, 시멘트 10만t, 의약품 14종등 수재물자 제공을 제의해 성사된 것은 처음으로 이뤄진 남북간 쌀교역 사례다.
당시 북한측은 이같은 제의를 남한측이 상투적인 것으로 치부, 수용치 않을것으로 판단했으나 전격적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화답해 옴으로써 쌀을 비롯한수재물자 조달에 곤욕을 치렀다는 뒷얘기는 잘 알려져 있다.이처럼 남북 당국이 선전차원에서 공방을 벌여온 남북간 쌀문제가 인도적 차원으로 부각된 것은 90년 4월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사랑의 쌀나누기 대회'가시작되면서부터.
당시 '사랑의 쌀나누기 운동본부'가 북한과 왕래가 자유로운 재미실업가 박경윤금강산국제무역개발총회장과 접촉, 북한으로 쌀을 보내는 일을 추진 했을때였다.
실제로 90년 7월 모두 8백t(1만가마)의 쌀이 북한에 반출됐다.이듬해 1월에는 북한이 다시 싱가포르의 제3국 상사를 통해 상업거래 차원에서 남한쌀 10만t 구매 가능성을 타진했고 석달뒤인 4월에는 사랑의 쌀나누기운동 실무책임자인 남한의 유상열 천지무역상사회장과 박씨가 다시 만나 쌀과무연탄등 물물교환에 합의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같은해 7월 1차분 5천t이 북한으로 반출됐으나 미국 도정업자들이국제식량기구(FAO)규정을 들어 강력히 항의하고 북한이 시멘트등 1차분에 대한대응물자를 보내지 않으면서 거래는 중단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한국선명회가 참여한 국제선명회측이 지난달 29일 중국산수수 4백70t을 중국 도문시에서 기차편으로 북한에 제공한 사례가 있으며, 한국선명회는 지난달 1천t의 쌀을 북한에 지원하기 위해 정부에 반출승인을 제출해 놓고 있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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