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제12회 매일여성생활수기 입선작-슬픔을 딛고

그날도 집안 구석구석을 털어내고 닦아내며 분주한 하루를 마무리한뒤 사모님께서 주신 1박2일의 휴가로 사랑하는 아들 딸을 만난다는 설렘을 지닌채마지막 밤차에 가까스로 올라탔다.언제나 시간에 쫓겨 타느라 제대로 좌석을 차지해본 적이 없는 터라 출입문 뒤의 작은 공간이나마 차지하기위해 달려갔다. 긴장과 피로가 한꺼번에몰려와서 차디찬 열차 바닥에 신문지 한장을 깔고 기대앉아 깜박깜박 졸다가동대구라는 차내방송에 정신없이허겁지겁 보따리를 챙겨 역앞 광장에 나오면 택시잡기도 쉽지가 않았다.

고요히 잠든 집앞 골목어귀에 들어서면 아무리 조심조심 걸어도 이집 저집개들은 왜그리도 크게 짖어대는지 곤히 잠든 이웃분들께 죄송스럽기만 했다.월 3만원 달셋방이라 허술하기 이를데 없는, 다 찌그러진 부엌문을 열고 들어서면 훈기라고는 느낄 수 없는 냉방에서 두 아이는 잠들어 있곤했다. 아이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무능하고 못난 자신을 원망하면서 내설움에 북받쳐소리없이 울기도 많이 했다. 그래도 에미가 왔다고 구김살없이 활짝 웃으며좋아하는 자식들. 오로지 아이들얼굴 보는 낙으로 실낱같은 희망을 꿈꾸면서 살았던 그 시절이었다.

당시 그곳은 대구 범어동 양계촌이었는데 닭장을 개조하여 방을 꾸며 여러가구가 한마당에 다닥다닥 붙어 살고 있었다. 모처럼의 짧은 휴가라 석유곤로불에 이것저것 만들어 두 아이에게 먹일세라, 밀린 빨래며 집안일을 대충이라도 하다보면 시간은 왜그리도 빨리 가는지!

또 한달간의 이별을 기약하며 허둥지둥 역으로 달려가야했다. 그때는 열차예약제도가 없어 운좋은 날은 서울까지 앉아서 가기도 했다. 서울에 도착하면 꿈에 본듯하니 자식들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금새 보고싶어졌다.사람의 운명이란 모를 일인가보다.

60년대후반부터 80년대초까지만해도 한창 새마을사업으로 지붕개량할 때라지방의 면소재지에서 시멘트기와 공장을 운영하면서 별 어려움없이 살았지만새마을사업이 끝나갈무렵부터 사업이 점점 사양길로 접어들었고 또한 아이들의 교육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심끝에 대구로 이사가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남문시장에서 장사를시작했다. 경험이 없는 우리부부는 실패에실패를 거듭하는동안 장사밑천을 모두 날리고 말았다. 실의에 빠진 남편은미국에 가면 목돈을 벌 수 있다고 꾀는 여권사기단에 속아 있는 돈 없는 돈다 끌어들여 미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남편은 말조차 통하지 않는 이역만리에서 그만 불치의 병을 얻고말았다. 나름대로는 병고치고 돈벌어보겠다고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은 모든것을 포기하고 돌아와서는 면목없다는 말 한마디를 남긴채 눈도 감지 못하고어이없이 삶을 마감했다.

남은 것이라고는 당시 2백만원이 넘는 부채와 세식구. 옛말처럼 집도 절도없는 처지였다. 자식들을 봐서라도 살기는 살아야겠는데 특별한 기술이나 밑천도 없이 어떻게 살아갈것인가 곰곰이 생각한끝에 식혜를 한 찜통 만들어서아침일찍 등산객을 상대로 장사해보려고 마음을 다져먹고 앞산까지 갔지만막상 아는 사람이나 없을까 고개를 들 수가 없어 소나무뒤에 숨고 말았다.한잔도 팔지 못한채 내려오면서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찾아가서도움을 청할만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하기쉬운 말로 이것 해봐라, 저것 해봐라 하고 말들은 하지만 나는 아무런자신도 능력도 없는 사람, 정말이지 못난이였다.

하루는 이불 월부장사를 해보라기에 이불 몇채를 이고 나갔다. 이집 저집기웃거리기만 했을뿐 '이불사세요' 소리조차 목에서 넘어오지를 않았다. 하루종일 골목길만 헤매다가 지칠대로 지쳐 이불만 돌려주고 못난 자신만 원망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은 꼭 용기를 내 일자리라도 알아봐야지 결심하지만 날이 밝으면 덜컹 겁부터 나니 어찌할꼬?

그러던 어느날 고향 언니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끝에 사정얘기를 했더니 다방의 주방일을 해보는게 어떠냐고 했다. 용기를 내 그 언니를 따라다니며 일을 배웠다. 덕분에 난생 처음으로 취직이 되었다. 정말 힘이 생겼다.다방 주방일을 시작한지 몇개월이 지났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무튼그날 일과를 마치고 다방식구들이 자기몫의 청소를 하기 시작했는데 갑자기수돗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우리 모두는 다음날 아침 일찍 청소하기로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열쇠를 가졌기에 이튿날 아침 일찌감치 나갔는데 계단을 내려가 다방문을 열고 한발짝 내딛는순간 첨벙하는 소리와 함께 발목이 물에 잠겼다.

깜짝 놀라 불을 켜보니 그 넓은 다방에 발목이 잠길 정도로 물이 차있었다. 어쩔줄 몰라 허겁지겁 주방으로 가보았더니 어젯밤 설거지하려고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물이 안나오니까 미처 잠그는걸 잊고 가버려 밤중에 그대로수돗물이 쏟아졌던 모양이었다.

나는 혼자 어떻게 해야할지 내정신이 아니었다. 우선 찜통에 물을 퍼담아2층 화장실로 퍼올렸다. 나혼자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우선퍼낼 도리밖에 없었다. 카운터 아가씨가 나와야 주인마담에게 연락이라도 할수 있을텐데 시간이 일러 아직 나오지 않았으므로 혼자서 죽자고 퍼내다가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서야 다방식구들이 하나둘나오면서 주인에게도 연락이 됐다. 아무튼양수기로 퍼내도 몇시간 걸릴 물을 여자 서너명과 이웃집 총각 한명이 하루종일 퍼내고 나니 얼마나 힘들었는지 근 한달간을 허리가 아파서 끙끙대야했다.

또 서툰 솜씨로 원두커피를 뽑다가 얼굴이며 손이며 몇번이나 화상을 입었는지? 어떤때는 커피포트를 깨뜨려 삼사만원씩이나 변상을 하고나면 종일 다리에 힘이 빠져 후들후들 떨려 서있기조차 힘들었다.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지만 천진난만하게뛰어노는 국민학생인 딸의 얼굴과 어릴때 이 에미가 날마다 아파서 병원에가던 기억밖에 없었다는 아들의 걱정스런 표정이 떠오르면 어떤 고생도 참아야지 하며 다시 한번 마음을 고쳐먹곤 했다.

짓궂은 농담으로 놀림을 받거나 볼것 못볼것, 들을 말 못들을 말 다 겪으면서 50이 넘은나이에도 남편없이 혼자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주인마담에게 억울하고 분한 소리 들을 때는 정말로 서러워서 혼자 숱하게 울었다.하지만 누구를 원망하랴, 팔자소관인 것을! 내 못난 탓인 것을! 그래도 이다음에 저 자식들이 크면 이 에미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알아줄테지, 그것만이 한가닥 바람이었다.

주로 약전골목의 다방에서 일을 했는데 아들이 고등학생, 딸이 국민학교 6학년일때 다방근처에 방을 얻어 저희들끼리 있게하고 나는 주로 다방에서 기거했다. 하지만 아들은 학교서 늦게 오지, 낯설은 곳에서 어린 딸 혼자 있는것이 걱정스러워 일이 끝나면 잠시 집에 뛰어갔다가 오곤 했다. 한번은 기거하는 아가씨에게 부탁하고 집에 갔다가 아들애가 오는 것을 보고 막 뛰어왔더니 주인마담이 퇴근후 확인전화를 했다가 아무도 받지 않으니 다시 와본모양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때 아가씨는 어떤 남자의 전화를 받고 잠시 다녀온다고 나갔던 모양이었다. 어쨌든 나를 믿고 다방을 맡겼는데 정말 변명의여지가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내가 그 다방으로 가기 얼마전에 비디오랑 텔레비전이랑 몽땅 도둑을 맞았다는데 나이든 나를 믿고 맡겼는데 사람이 없으니 얼마나 화가났을까. 그때만해도 비디오가 집집이 별로 없던 때라 값도무척 비싸고 비디오가 없는 다방도 많았던 시절이었다.

너무도 미안한 마음에 무릎이라도 꿇고 빌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다시는 집에 가지 않겠노라고 약속할 수도 없어서 그 다방을 그만두었다.그 이후에도 이다방 저다방 다니면서 부지런히 일을 한 덕분에 생계유지는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들이 고3, 딸이 중1이 되니 학자금이 힘에 겨웠다. 보기에 딱했던지 이웃집 아주머니가 동장을 찾아가 어려운 사정을 말하고 영세민혜택이라도 받으면 딸의 공납금은 면제받을 수 있을거라고 했다.그래서 동장에게 사정을 말씀드린 결과 여러가지로 도움을 받을 수가 있었다.

오랫동안 지하다방에서 일을 해서 그런지 몸 구석구석 안아픈데가 없을 정도로 지쳐 한달쯤 쉬고 싶었다. 넓은 바닥청소에다 오랫동안 서서 하는 일이라 다리가 아픈데다 담배연기를 많이 마셔 그런지 눈도 나빠지고 거기다 이빨조차 거의 빠져 여러사람 앞에 나서기도 부끄러웠다.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 일해야겠다싶었는데 어쩌다보니 서울에서 남의집 일을 하게 됐다. 신문광고를 보고 찾아갔더니 비밀소개소인듯 사람들이서로 눈짓을 하는데다 인상이 무섭고 예감이 이상해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도망쳤다. 그 다음날도 신문광고를보고 신촌역근처에 갔는데 인상이 나쁜 사람은 아니어서 내 처지를 말했더니 마침적당한 일자리가 있다면서 전화를걸었다. 1시간쯤 지났을까 50대후반쯤 돼보이는 부인이 왔다. 이런저런 얘기끝에 인연이 돼 그로부터 5~6년을 그집에서 살게됐고 친척이상으로 정이 들었다.

워낙 깔끔하신 분이라 때로는 너무 힘들고 괴롭기도 했다. 또 서로 오해때문에 의심하고, 의심받았을땐 정말 기가 막히고 가슴이 터질것만 같았다. 행여라도 나처럼 어려운 처지에 놓여 가정부 일을 하더라도 양심에 부끄러운일은 절대 없어야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없이 살며 고생하는 것도 서러운데도둑취급까지 받아서야될까. 이 생활속에서 가장 견디기 힘들었을 때는 양심을 도둑맞았을때인것 같다.

한달도 거르지 않고 1년에 열두번씩 서울~대구를 오르내리며 몇년이 지나갔다. 아버지가 안계신탓에 청소년기에 한동안 방황했던 아들은 가정형편상대학진학이 힘들지만 시험이라도 쳐봐야겠다며 마음을 다지고 공부하더니 서울시립대 경영학과에 합격을 했다.

경기도 일산에 있는 백부댁을 찾아가 어렵게 도움을 청하는 말을 꺼내봤으나 거절당하자 충격을 받은 아들은 진학을 포기하고 울면서 대구로 내려왔다. 절망에 빠져있던 아들은 차츰 마음을 추슬러수성구청에 임시직으로 취직을 했다. 취직후에도 말이 없고 늘 침울한 표정이더니 차츰 직장선배들과 같이 어울리면서 성격도 명랑해지고 말수도 늘었다.

하지만 6개월쯤 잘 다니더니 아무래도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며 다시입시공부를 시작했다. 친지들은 고생하는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공무원시험이나 쳐서 취직할 것이지 대학이 무슨 대학이냐고 야단들이었지만 굽히지 않고독서실구석에 틀어박혀 끼니도 거르면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때 교직에계시는 이모부께서 교육대학을 권유해 교대로 갔다. 처음엔 적성에 맞지않는다며 투덜거리기도 하더니 곧 적응하게되면서 아르바이트도 이것저것 가리지않고 부지런히 해가며 열심히 공부를 했다.

아들이 아르바이트로 제법 용돈정도를 벌게되자 명덕로터리쪽으로 이사를갔다. 냉방을 면할 수 있었는데다 교대가 가까워서 교통비도 절약할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여름이 되니 너무 더워서 힘들었다. 한번은 서울에서 새벽차로 집에 오니 문을 꼭 닫은채 선풍기를 틀어놓고 딸이 혼자 자고 있었다. 밤새 열받은 선풍기가 후끈후끈 달아올라 방안 공기는 질식하기 딱 알맞았다.아들애는 아르바이트로 밤경비서기위해 가고 없고 딸이 혼자 자려니 문을 꼭꼭 잠글 수 밖에. 다행히 보충수업하고 늦게 잠들었는 데다 나역시 예정보다하루빨리 내려왔기에 딸을 살릴 수가 있었다.

아들이 졸업반이 됐다. 그때는많은 사람들이 졸업을 하고도 어느 세월에발령이 날까싶어 아득해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 행운인가. 졸업과동시에 교사발령이 났다. 꿈만 같았고 너무 기뻐서 눈물이 핑 돌았다. 첫임지는 경북 북부지방인 영양군수비면의 한 국민학교였다. 군소재지에서 20여㎞나 들어가는 산골마을. 길 중간중간에는 비포장도로여서 초봄 해빙기를 작은 이사 짐 트럭으로 들어가니 마치 논바닥을 지나는 것처럼 질퍽질퍽해서기사아저씨도 이런 길은 처음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가도가도 하늘과 땅밖에보이지 않던 길을 꼬불꼬불 몇 굽이를 더 돌아가니 시야가 넓어지며 마치 지상의 낙원인양 아담하고 평화로운 마을이 보였다.

학교운동장을 지나 사택에 도착하니 마치 객지에서 고생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듯 반가이 맞아주시던 교장선생님의 다정하신 첫인상을잊을 수가 없다. 이 교장선생님은 후일 아들의 주례까지 서주셨던 분이다.아들이 교사가 되고도 나는 한동안 서울에서 가정부 일을 했다. 추석휴가때의 일이 생각난다. 사모님이 이것저것 챙겨주신 선물보따리를 안고 서울역에 도착하니 추석밑이라 사람이 인산인해였다. 그래도 줄을 서서 기다리고있으니 어떤 사람이 다가와 '대구, 부산 5천원'하면서 살짝 귀띔해 주고는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행여나싶어 따라가보았더니 역앞에 봉고차 한대가서있는데 벌써 사람들로 꽉차고 뒤에 두사람분 좌석만 남아있었다. 단지 집에 가야한다는 생각만으로 얼른 올라탔는데 알고보니 특공대 총알택시라는것이었다. 정신없이 달리는 차안에서 공포의 몇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더니오밤중에 고속도로상에 내려놓고는 쏜살같이 달아나버렸다.겨우 추석날 새벽에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도 이것저것 아버지 제수를 준비해놓고 엄마오기만 기다리고 있는 딸이 얼마나 고맙고 대견했던지….제또래 친구들은 엄마가 모든걸 뒷바라지해 주어도 투정하는데 어린 나이에 제손으로 밥짓고 빨래하고 반찬만들어 오빠 도시락 제도시락 챙기며 학교에 다니려니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을까. 거기다 학교에서는 근로장학생이라쉬는 시간에 도서실에서 일을 하고 종이 울리면 교실로 뛰어가야했다. 담임선생님께서 가정방문을 오셨다가 딸의 처지를 보시고 특별히 근로장학생으로추천해주신 배려가 있었기에 그자리를 얻을 수가 있었다. 고달픈 생활속에서도 딸애는 선행학생으로 뽑혀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여러가지로 도움을 주신 고마우신 선생님을 한번 찾아뵙고 인사라도 드렸어야하는데 조금 형편이좋아지면 찾아뵙는다는 것이 지금까지 인사를 드리지못해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딸을 생각하면 항상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저며온다. 그래도 한번도 에미를 원망하지 않고 싫은 내색없이 그저 한달에 한번 엄마 만나는 기쁨으로 착실하게 살아온 애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밖에 살 수가 없었는지,식구라고는 단 세식구뿐인데 무엇때문에 그렇게 헤어져 살아야했는지 나의무력함이 뼈속까지 사무친다. 다른 사람들은 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해서라도자식을 품고 공부시키며 살아가는데 지지리도 못나디 못난 나는 왜 이렇게살아야할까싶어 혼자 자학도 해보았으며 어떨땐 하도 답답해 철학관이라고찾아가보았으면 싶기도 했다.

아들이 발령받은지 1년쯤 지난뒤 서울의 가정부 일을 그만두고 영양으로내려와 온식구가 오랜만에 합쳤다. 딸애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엄마를 더이상 고생시킬 수 없다며 진학을 포기하고 시골학교 교사로 가있는 오빠에게다니러간다고 하더니만 오빠에게서 대학진학을 권유받은 모양이었다. 공부는시기가 있는 법인데 더구나 여자는 공부시기를 놓치면 안된다고 했던 모양이었다. 딸애는 대구로 돌아온뒤 학원으로 독서실로 오가면서 식빵을 가방에넣고 다니며 끼니를 때우고 저나름으로는 열심히 공부했던가보다. 그이듬해영남대 국문과에 합격했다. 영천 이모댁에서 통학하며 제힘으로 공부한답시고 이것저것 아르바이트 해가며 열심히 학교에 다녔다.

그러던중 학교선배 한사람을 알게돼 먼거리 등하교를 도와주며 가까이 사귀다가 학업도중에 결혼을 했다. 갑작스레 딸을 시집보내고 나니 할 일을 마무리 못한것처럼 마음이허탈했다. 그래도 인심좋은 시어른들께서 친딸처럼사랑해주시고 보살펴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딸이 아이를 가졌을땐너무 일찍 결혼시켰나 싶어 마음아팠지만 꼭 저같이 예쁜 딸을 낳아 온집안에 웃음꽃이 피게했다. 딸은 엄마가 되고서도 공부에 미련이 남았는지 올가을엔 복학해서 공부해야겠다며 준비하고 있다.

아들은 첫임지에서 같이 근무하던 동료와 결혼해서 표창도 받아가며 저희들 나름대로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어느새 할머니가 된 나는 네살바기손녀딸의 재롱을 보면서 나자신을 되돌아본다. 일제말기, 봉건사상이 지배적이고 남존여비사상이 절대적인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누구에게도 지지않으려는 승부욕으로 가득찼던 국민학교시절…. 그토록 가고싶었던 중학교진학이 좌절됐던 사춘기, 강의록으로 혼자 공부하여 고등학교에 진학했던 꿈많은여고시절, 아들이 아닌 딸이었기에 대학진학을 포기해야했던 20대…. 60을바라보는 이 나이에 돌아보니 모두가 꿈같기만 하다.

이제는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제몫을 다하며 커가는 자식들의 모습을지켜보면서 남은 여생을 후회없이 열심히 살다 갈 생각이다. 자식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효도를 받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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