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그의 '조선상고사' 총론에서 조선시대가 낳은위대한 安鼎福을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전문가로 평가했다. 그만큼 안정복의'東史綱目'이 다른 사서에 비해 전문성과 사실 고증이 정확하다는 것을 대변하는 것에 다름아니다.상고시대(단군조선 기자조선)부터 고려말까지 한국사를 총정리, 綱目體로쓴 한국초유의 국사개론서 '동사강목'은 그가 43세되던 1754년(영조 30년)부터 착수, 48세 되던 1759년에 초고가 완성되었고 세상에 알려진 것은 1781년 정지검이 정조에게 이 사서를 상납하면서부터였다.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간추려 '綱'으로 내세우고, 그것을 일일이 다시 설명하는 '目'을 붙이는 강목체 역사서술은 일관된 사관을 갖지 못한다든지 사학 전반에 대한 안목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로 조선후기 들어 유계의 '여사제강', 홍여하의 '동국통감제강', 홍만종의 '동국역대총목', 임상덕의 '동사회강'등으로 꾸준히 이어져왔다. 하지만 안정복은 선배학자들의 저술이 대체로 강목 형식의 일관성과 정통론의 해명에 충분치 못한 것으로 보아 비판을서슴지 않았다.
실학을 바탕으로 우리역사를 도덕주의적 기준에서 체계화하였던 안정복의정통사관은 근현대사에서 철저한고증과 역사적 흐름에 대한 완벽한 인식이높이 평가되고 있다.
국력보다 도덕성과 혈연성이라는 잣대로 왕위찬탈을 터부시하며 국가의정통성을 따졌던 그는 단군-기자-마한-통일신라-고려를 정통으로 취급하고삼국시대를 無統시대로 간주, 한국사의 체계를 재구성하였다. 이는 김부식이삼국시대부터 신라를 정통으로 잡은 것과는 판이하다.
그는 세조때 관찬사료인 '동국통감'에서 단군조선을 기자조선 위만조선과함께 '3조선'이라 하여 외기로 처리한 것을 잘못이라고 비판하였다.기자조선은 '8조 법금'과 정전제를 실시하여 우리나라를 문화국가로 자리매김시켰기 때문에 정통으로 보았고, 기자의 후손인 기준이 위만을 피해서남쪽나라 마한의 왕이 되어 기자에 대한 제사를 계속한 점을 들어 마한이 기자조선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보았다. 삼국을 무통으로 취급한 것은 주자가 병립한 국가들을 무통으로 처리한 전례에 따른 것이었다.상고에서 고려말까지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안정복은 건국을 합리화하기위하여 고려문화, 삼국시대사를 덮어놓고 공격하는 치기를 벗어나지 못하던조선초기 사학자들의 曲筆을 비판하고, 오류를 지적하며 '고려사'나 '동국통감'의 서술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고려말 우왕이나 창왕을 신돈의 혈통이라고 주장하는 '고려사'를 안정복은 배격했다.
위만조선 궁예 견훤등은 정통국가에 대해 적대적이었다는 점으로 인해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17세기 이후 대두한 강목체 역사서술(여사제강, 동사회강)과 우리 역사의상한선을 단군왕조까지 높인 삼한정통론(홍여하 이익)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한백겸 이후의 역사지리학풍을 수렴한 '동사강목'을 통해 안정복은 무엇을 말하려했던 것인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학자들의 사명이 정통을 바로잡고, 충절을 숭상하며 제도와 문물을 반듯하게 잡기 위한것'이라고 강조한데서 알수 있듯이안정복의 동사강목은 권할 것은 권하고 경계할 것은 경계시키는 '勸戒'를 강하게 담고 있다. 충절과 국방, 고증을 강조하고 이단을 경계시켰다.충절의 모범을 보인 인물로 기자조선의 대부례와 성기, 삼국시대 광개토왕계백 마의태자등을 충신 혹은 의군으로 칭송하고 있다. 기자조선의 대부례는무모한 정벌계획을 중지시켰고, 성기는 한의 침략에 끝까지 저항한 충신으로평가했다. 또 광개토왕은 할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백제를 침공한 의군으로계백은 처자를 먼저 죽인후 나당연합군과 싸운 충신으로, 마의태자는 신라와더불어 운명을 같이한 인물로서 모두가 이로움을 버리고 의로움을 좇는 행적을 그렸다.
고려시대에도 부당하게 폐위된군주를 위해 병사를 일으킨 조위총이 충신으로 극찬되고, 나말에 역성혁명에 참여한 개국공신이나 우왕 창왕을 신씨로몰아 폐위시키는데 앞장선 신하들도 불충스럽거나 사리에 얽매인 소인들로비난한다. 정도전 조준등에 대한 폄하가 그것이다.
동사강목 지리고에서 잃어버린 땅 요동반도에 대한 회복정신을 강조했던안정복은 바다방위(海防)의 중요성도 십분 강조했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지리적 조건으로 보아 당연히 중요성을 띠는 해방은 중국과 일본에 다 해당된다고 보았다. 안정복은 고조선때 한무제의 수군파견을 예로 들면서 서해안에 있어서 해방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신라의 경우에도 중국의 침략을 받기는 마찬가지여서 해로를 통해 신라인을 노비로 약탈하는 사태를 막기위해 장보고로 하여금 청해진에서 해상을 순찰하도록 했다는 것이다.안정복은 對日 海防과 관련하여 대마도에 대한 제압의 필요성을 누누이 강조했다. 대마도는 언제나 왜의 침략을 향도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왜를 제어하고자 할때에는 반드시 대마도의 왜를 제어하는 방책을 강구해야한다는것이다.
대마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마도가 본래 우리땅이었다는 생각에서 스승 이익과 더불어 그 귀속문제를 토론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장 대마도에 대한 응징이나 그 영토화를 당면정책으로 주장한 것이아니라 대마도의 전략적 가치와 영토권을 의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요컨대 안정복의 국방관은 기본적으로 중국과 일본을 가상 적국으로 가정하고 바다 방어체제 구축을 역설한 데서 특색을 찾을 수 있다.중국에 대해서는 요동, 일본에 대해서는 대마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 것은 안정복의 국방의식이 단순히 현상유지의방어개념을 벗어나 국토회복의 적극적인 자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만년에는 그의 동료들인 남인중에 천주학을 믿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천학문답'을 지어 배척하고 이로 말미암아 장래에 화가 있을 것을 충고했는데과연 얼마 안있어 천주교 탄압이 일고 말았다.
〈崔美和기자〉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우리 아기가 태어났어요]신세계병원 덕담
"하루 32톤 사용"…윤 전 대통령 관저 수돗물 논란, 진실은?
'이재명 선거법' 전원합의체, 이례적 속도에…민주 "걱정된다"
연휴는 짧고 실망은 길다…5월 2일 임시공휴일 제외 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