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복50년 해외기획취재 시리즈-남목청사건

임시정부가 피난지로 택한 장사를 취재팀이 찾은 것은 작년 7월1일이었다.지금보다도 20일쯤 앞서는 계절이었으나 열차 창문으로 보이는 들녘엔 벼가누렇게 익어 있었다. 또 그 바로 옆 논에서는 모심기가 한창 진행 중이기도했다. 말로만 듣던 3모작 지대였던 것이다. 새삼 이국에 와 있음을 실감케하는 장면이었다.장사는 호남성의 성도였다. 동정호를 기준으로 그 남쪽에 위치한 것이 호남성이고, 북쪽에 있는 것이 호북성이라고 했다. 여기까지 온 김에 그 유명한 동정호를 보고 싶었으나, 동정호는 장사에서도 1백80㎞나 떨어져 있다는얘기였다.

호남성 성도 장사

호남성의 여러 강은 북쪽으로 흘러 성 경계지점의 동정호로 들어간다고 했다. 한복판에 군산이라는 산까지품고 있는 동정호는 면적이 무려 3천9백㎢에 이르는 육지 속의 바다 규모여서 그 많은 강물을 모두 품어들일 수 있는모양이었다. 그런 다음 북쪽에 연결돼 있는 장강 즉 양자강으로 물을 내 보낸다는것이다. 동정호와 장강과의 연결 지점에 역시 유명한 악양루가 있다고도 하지만,우리 독립지사들이 장사로 오면서 장강에서 곧바로 물길을이용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지리적 구조 때문이었다.

호남성 성도인 장사는 도심 인구가 1백40만명 정도라고 했다. 장사도 광역시 형태여서, 그들이 '시교(시교)'라 부르는 외곽 농촌 지역까지 합하면 인구는 5백50만명 정도 된다고 했다. 시가지는 남북으로 흐르는 상강(상강)에의해 좌우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오른쪽이 주요 시가지이고, 왼쪽 즉 서쪽은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는 악록산(악록산)이었다. 구운몽 같은 우리고소설에나 시문에도 자주 등장하는 남악(남악) 즉 형산(형산)의 기슭산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악록산이 우리에게까지 알려진 것은 그곳에 유명한 주자의 '악록서원'이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서원은 주자학의 산실이기도 하고,모택동이 공부한곳이기도 하다. 굉장한 규모가 우선 찾는 이를 놀라게 하지만, 곳곳에 붙어있는 역대 황제들의 하사 액자들이 또 볼만했다. '도남정맥''학달성천' 등의문구들이 액자들에 담겨 있었다.

하사액자 볼만

그러나 중국 공산 정부 수립이후엔 주자보다도 모택동이 더 중요한 듯 전시실은 모택동의 혁명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이 지역 출신인 모택동은이 서원에 설치된 호남제일사범대학을 나오는 것으로 청년기를 시작했었고20년대에는 그의 활동주 거점이 이 지역이었다. 중공의 거물이었던 유소기도 이곳 출신이었다.

장사에는 또 한나라 때 죽은 사람의 사체가 거의 숨질 당시 모습 그대로발굴된 마왕퇴(마왕퇴)라는 분묘가 있어 유명하기도 하다. 대부분 말라붙은미라 형태로 발굴되는 것과 달리 '살아있는 사체'가 발굴됐다는 것이다. 이분묘에는 그때 발굴된 사체를 해부해 내부 장기들을 따로 떼어내 살아있는사람의 장기처럼 전시하고 있기도 했다.

그외 20세기 들어서도 중국 역사를 뒤바꾼 신해혁명 주요 근거지가 되기도하는 등 장사는 중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이다. 하지만 우리와도 적잖은 인연을 가진 곳이 또 장사이다. 임정이 이곳을 거친 것을 시작으로, 40년도쯤엔 김원봉 계열의 조선의용대가 중국군과 함께 장사대회전에 투입돼활동했다. 임정쪽도 43년7월 다시 병력을 이곳으로 파견해 추가병력을 모집했다. 일본군으로 동원된 우리 청년들이 이 지역에 많이 배치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 소속 우리 청년들이 상당수 탈출한 곳도 이곳 장사였다. 44년5월 장사4차 회전 때였다.

임정 추가병력 모집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장사는 아주 먼 곳이 돼 있다. 만주 출신으로 이곳에서 여행 가이더를 하고 있는 교포 이양은 "3년동안 이곳에 근무했으나 한국팀은 꼭 네번밖에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은 모국어인 한국어가이드 보다는 일본인을 상대로 한 일본어 가이드를 주업으로 하고 있다는것이었다.

그러나 취재팀이 묵었던 장사 제일의 호텔 화천대반점 객실 냉장고는 우리금성사 제품이었다. 금성사에서는 또 이곳에 1억2천만달러를 들여 브라운관공장을 짓기로 하고 작년 당시 준비를 진행 중이라고도 했다. 역시 기업들은일반 국민들이 잠들어 있는 새벽에도 세계를 뛰고 있는 것이었다.37년12월 도착해 38년7월 떠나기까지 약 7개월을 이곳에 의탁했던 임시정부는 장사에서 아찔한 사건을 겪었다. 까딱했으면 우리 독립운동의 중추들을거의 잃을 뻔한 사건이었다.

흔히 남목청(남목청)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38년5월6일에 발생했다.장사의 시가지는 동서남북구 등 5개 구로 나뉘어 있는데, 임시정부 인사들이 살던 곳은 그 중 서구였다. 임시 청사도 여기에 있었고, 셋방도 여기에있었다. 그 중 현익철-지청천-김학규-조경한 등 지사들이 가족을 데리고 함께 세든 집이 현재의 장사시 서구 남목청2호(당시9호)였다. 당시 임시정부주변에는 3개의 정당이 정립하고있었으며, 남목청2호에 세 든 인사들은 모두가 조선혁명당 소속이었던 것으로 미뤄 같은 정당 인사들끼리 모여 살았던게 아닌가 싶다. 이들은 만주에서 남하한 세력들이었다.

조경한선생의 '백강회고록'에 의하면 당시 임정이 있던 서원북리에 살았던것으로 보이는 한국국민당의 김구선생이 저녁을 한턱 내기로 하고 이 조선혁명당 인사들 숙소에서 3당 통합 문제를 의논하자고 제안했다. 이 자리에는남목청 거주자 및 유동열 등 조선혁명당 인사들, 한국국민당의 김구-조완구선생, 한국독립당의 조소앙-홍진선생 등이 참석했다.

사건은 이 자리에 종전 조선혁명당 소속이었던 이운환이라는 청년이 난입해 권총을 난사한 것이었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당시 3개 정당 사이에상당한 이견이 있었던게 원인이 아닌가 보인다.

"의견차 원인"추측

이 사건으로 현익철선생이 생명을 잃었다. 그리고 김구선생이 중태에 빠졌으며, 지청천장군도 다쳤다. 현익철선생은 앞서 말한 악록산에 묻혔다. 누구도 찾기 힘들 중국 산하 또 한곳에 또 한사람 우리 지사의 피와 살이 흩어져간 것이었다. 백범선생은 오랜 입원 생활을 하고야 퇴원할 수 있었다. 그의'일지'는 그때 중국 장개석 장군 등이 보내준 고마운 지원을 거듭 강조해 적고 있다. 입원비도 모두 그에게서 나왔었다는 것이다.

아찔하고 아찔한 사건의 현장은 골목안의 2층 나무집이었다. 집이 그럴싸해 장사에서는 독립 지사들의 생활이 그래도 조금은 나았었나 생각케 했다.이 동네 한 할머니는 "근래 들어 한국사람들이 더러 찾고 있다"고 말했다.여기서 피격된 인사들은 즉시 상아(상아)의원이라는 병원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았었다. 이 병원은 현재 호남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돼 있었고, 대학과길 하나를 두고 맞보고 있었다. 그러나 6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 건물까지 옛 그대로일리는 없었다. 의대 직원은 지금의 콘크리트 현대식 건물은90년도에 신축됐다고 일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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