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부는 '8월의 문화인물'로 백범 김구선생을 선정, 발표했다.백범은 국내에서의 항일운동뿐 아니라 3·1운동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주석으로 선임되어 독립운동을 지휘했으며 해방후 고국에 돌아와 분단된 나라의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기울인 민족의 큰 스승이다.김구선생기념사업회와 독립기념관, 국립중앙도서관등은 이 기간중 김구선생 기념강좌, 유품을 포함한 관련자료전시회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본관이 안동인 백범은 1876년황해도 해주에서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곽낙원사이의 7대 독자로 태어났다.
18세때 봉건사회에 반감을 느껴 동학에 입교한 백범은 이듬해 교주 최시형을 만나 팔봉도소의 접주로 임명돼 해주성을 공략하는 등 활약을 벌였다.또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문하에서 훈도를 받았으며, 솟구치는 항일의식을 참지못해 압록강을 거쳐 만주로 들어가 김이언의 의병단에 가입하기도 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준, 이동녕등과 함께 을사조약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 구국대열에 앞장선 백범은 1908년 해서교육회 총감으로안악에 양산학교를 설립했으며 이듬해 애국심고취를 위한 전국강습소를 순회하는 한편 보강학교교장을 맡아 후세의 의식개혁에도 열정을 쏟았다.같은해 비밀단체인 신민회의 회원이 된 백범은 1919년 3·1운동직후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령을 역임했다.1928년 이동녕, 이시영등과 한국독립당을 결성, 당수가 된후 항일무력활동을 전개했고 2년후 한인애국단을 조직, 이봉창의사의 일본왕저격사건, 윤봉길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일본왕폭탄투척사건등을 지휘했다.해방후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신탁통치가 결의되자 반탁운동에 나선 백범은 이후 자주독립촉성중앙협의회 부의장, 민족통일총본부부총재등을 지냈다. 해방후 반탁운동과 함께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을실시한다는 UN결의에 반대,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 김규식과 함께 북한에 가서 정치회담을 가졌으나 실패했다.
그후 정부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민족의 양심에 호소하며 민족통일 원칙을계속 주창하다 1949년 6월26일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해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서울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저서로 백범일지, 도왜실기가 있다.
다음은 '김구의 달'기념사업일정이다.
△7월31~8월4일(오후 2시):독립기념관 청소년대상강좌 개최△8월1~31일(국립중앙도서관 1층 로비)-국립중앙도서관 관련자료전시회개최
(독립기념관 제5~6관)-독립기념관 김구특별전시회개최
△8월5~9월30일(오후 9시50분):KBS1 TV 광복50주년 기념기획드라마 '김구'방영
△8월10~9월10일(예술의 전당 서예관)-예술의 전당 '애국지사유묵전'개최△8월26일(오후 3시, 백범회관):김구선생기념사업회 기념강좌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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