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군이 중국군 지휘 아래로 들어가던 42년도에는 그보다 큰 일들이 두개나 함께 일어났다. 김원봉 계열이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또 그 산하 조선의용대가 임정 군대이던 광복군의 일부로 편입된 것이 그것이었다. 이 세개의'사건'은 거의 같은 상황-동일한 조건에 의해 연쇄됐다.**'불관주의' 청산**
1919년 의열단 결성으로 출발한 김원봉계의 활동은 23년이 흐른 이때까지도 임시정부에 대해서는'불관(불관)주의', 즉 관계하지 않는다는 신념으로일관하고 있었다. 대신 그는 별도로 큰 세력을 형성하면서 중국 정부와도 독자적 창구를 열어놓고 있었다. 이로인해 중국에는 김구선생(임정)계열과 김원봉 계열이라는 두개의 큰 산맥이 따로따로 형성돼 있었던 것이다.그러던 김원봉이 임정에 참여하겠다고 나선 것은 wjr
잖은 변화임에 틀림없었다. 이 변화에 대해서는 분석이 여러가지이다. 그중에는 의용대 주력의 월북 이후 중국 정부가 그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있다.
또 당시엔 이미 2차 세계대전에서의 연합국 승리가 가시화되면서 연합국이임정을 한국의 유일 정부로 승인할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해졌기 때문이라고분석하는 학자도 있다. 일본은 41년12월7일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 기지를 공격함으로써 미국의 참전을 유발했다가 6개월만에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패함으로써 서서히 침몰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민혁당이 임정 참여를 당론으로 최종 결의한 것은 진주만 기습 이틀뒤에 열린 전당대회에서였다.
김원봉의 민혁당이 임정 참여를 처음 시도한 것은 41년10월 임정 의정원의33차 회의에서였다. 그러나 임정측 신고를 받고 출동한 중국 헌병에 의해 민혁당측 대표들은 쫓겨났다. 김원봉 계열이 임정에 불관주의로 일관했듯이,백범 계열은 김원봉 계열을 아주 못마땅해 했던 것이다. 임정측은 나아가 이러한 시도를 의정원 의장 김붕준선생이 알선 묵인했다고 해서 그를 의장에서해임시켜 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 관계까지 꼭 그런 것은 아니었던듯, 43년 상처한 김원봉이 45년1월 재혼의 예 식을 올릴 때 백범은 주례를 맡기도 한다.민혁당 계열의 임정 참여가 성사된 것은 그 일년뒤인 42년10월이었다. 그사이 중국은 두 세력의 강제 통합에 아주 열성이었다. 광복군의 중국군 휘하편입을 일방 통보하면서 5월엔 김원봉 계열 의용대도 광복군에 편입토록 명령(5월)해 놓고 있었다.또 임정에 대해서도 연립 정부 구성을 요구, 차관제공의 전제 조건으로 하기도 했다.
이때의 첫 연립 정부 구성으로 임정에 참여한 김원봉 계열 인사는 공보처장관(선전부장)이 된 김규식과 교육부장관(학무부장)이 된 장건상 등이었다.당시 국무위원은 9명이었으나, 민혁당 인사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두 자리를늘렸던 것이다.
다시 일년뒤에는 의정원에도 진출, 의원 48명 가운데 절반인 24석은 백범의 한독당이 차지하고, 민혁당은 4분의1인 12석을 배정받았다.**연합국 일원 참전**
이 시기 임정은 광복군 창설 등 군사활동 외에도 외교에서도 변화를 이뤘다. 종전에는 망명정부로서 승인받는 것이 외교의 목표였다. 그러나 이때부터는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국이 되려는 '참전외교'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임정은 진주만기습 직후이던 41년12월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42년3월에는 미국에 참전 의사를 전달했다. 6월에는 연합국 회의 참가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기의 임시정부 청사는 현재의 중경시(중경시) 화평로(화평로)2항(항) 5-6-7호집(당시는 오사야항 1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경시 시중구(시중구) 구청 청사에서 내려가는 가벼운 비탈길이 화평로였고, 1백여m를내려간 길가 집이 5호였다. 6-7호는 5호 뒤쪽으로 붙어 있었다.이 임정 청사는 김구선생이 그의 '백범일지(일지)' 상하권 중 하권을 썼던곳이기도 하다.백범의 출생으로부터 국내 활동까지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상권은 그가 상해에 있을 때 쓴 것으로 돼 있다. 여기서 썼다는 하권은 중국망명 이후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곳 청사의 작년 모습은 거의 폐가나 다름 없었다. 길가에 붙은2층짜리 5호 집만이 흰 타일이나마 붙이고 있을 뿐 6-7호는 다 부서진 벽돌기와집이었다. 더욱이 일부에는 작년 당시 불이 나 형체가 더욱 볼썽 사나웠다. 주민들은 "본래 8가구가 살았으나 불이 나 4가구는 이사 가고 나머지도이사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첫청사 폭격 소실**
이 집은 임정이 중경으로 옮겨 오면서 처음부터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현재의 임강로(임강로:당시의 석판가)에 자리 잡았으나 거기 있던 첫청사는 일본군의 폭격으로 소실됐다. 이어 현재의 중화로(중화로:당시 양류가, 중경 광복군 사령부유적 뒷길)로 옮겼다가 세번째로 이곳으로 이사 온것이었다.
비록 허물어져 폐가를 방불케 했지만, 이 어드메쯤에서 김원봉 계열의 사람들이 임정 참여를 주장하며 농성까지 벌였을 것임을 생각하면 우리와의 인연이 그렇게 가벼운 것은 결코 아닐 터였다.
광복 50주년인 올해 8월11일 복원돼 성대한 기념식까지 가진 중경의 임정청사를 중경에서 임정이 줄곧 사용한 청사로 오해할 소지가 있지만, 이것은임정이 43년 가을부터 귀국할 때까지 불과 2년여 사용했을 뿐이란 점도 환기해 두고 싶다. 이는 앞의 청사 자리에서 3백여m 떨어진 곳에 있는 네번째로옮겨간 건물이다. 상해 임정 청사 여러 곳 중에서 마지막 것만이 남아 보존되고 있듯이 중경의 임정 청사 중에서도 마지막 것만이 이제 보존의 길을 튼셈이다.
**중국이 무상 임대**
임정 최후의 이 청사는 그 이전에는 여관이었다고 했다. 현재 주소는 중경시 시중구 연화지(연화지)38호. 대지의 너비가 17m, 길이가 43m(2백20평)라는 이 여관을 중국 정부에서 임정 청사로 무상 임대해줬다는 것이다.하지만 규모는 컸으나 큰길가 번듯한 지점은 역시 아니었다. 20~30m 걸어들어가야 하는 골목 안집이었다. 이점이 또 한번 취재팀에게 '이곳은 역시남의 땅'이라는 깨우침을 줬다. 우리 땅에 정부를 세운다면 어찌 골목 안집을 정부 청사로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주소 중에 나오는 연꽃못이라는 뜻의 '연화지'라는 지명이 한국인에게는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것은 일대에 큰 연꽃못이 있었던데서 유래한 동네이름이라고 했다. 이 일대는 또 '칠성강(칠성강)'이라 불리기도 하는 곳이었다. '강'은 얕은 언덕을 뜻하는 말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임정은 이곳에 태극기를 번듯이 달고 집무했다. 청사에공개적으로 태극기를 달기는 1919년 임정이 생긴 뒤 안창호 선생이 들고 온미국 교포들의 돈으로 샀던 상해 첫 임정 청사 이후 만 24년만이었다.보수 복원 작업이 끝난 현재의모습과는 달리 복원 공사 이전인 작년 7월의 이 건물 모습은 중앙의 긴 옥내 골목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4채의 건물이들어 선 형상이었다. 지금 전해 오는 임정 요인들의 환국 기념 사진은 이 옥내 골목 막바지 계단에서 찍은 것이기도 하다.
임정 청사 건물을 빽 둘러싸고는 유해건설이라는 회사에서 10~20층 짜리아파트를 건설하고 있었다. 임정청사 건물도 본래는 헐리고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었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답사팀이 구해냈다는 것이다. 93년6월 복원을 위한 양국 합의에서는 한국이 1백30만달러를 중국에 지불키로했다는 얘기도 들렸다.
중경시 외사판공실 진전은부주임은 "복원될 부지는 5백평"이라고 말하고,복원 후에는 산하 대외우호협력협회에서 관리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중경시 문화국 문물처 대유화처장은 "시에서 직접 관리해야 격이 높아질 것"이라고 해서 자신들이 관리하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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