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실학-개혁이끈선조들의 슬기(28)-연암 박지원(상)

연암 박지원은 조선 후기 최고의 대문호다. 불후의 여행기인 열하일기는그가 미처 탈고하기도 전에 널리 필사되어 읽혔다. 멀리 대만에까지 필사본이 전해졌다. 현존하는 열하일기 이본만도 10여종이 넘는다. 이본이 나돌다보니 정본은 찾을 길이 없을 정도다. 그가 20세기 후반에 태어났다면 베스트셀러 작가로 열하일기 판권만으로도 거부가 되었을 것이다. 방경각외전에 실린 여러 전도 그의 문명을 떨치게한 작품이다.연암은 최고의 작가였을 뿐만 아니라 북학파의 영수로 실학분야에서도 우뚝 솟아있다. 그는 선진과학기술의 도입과 상품유통경제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국제무역을 주창했다. 당시 청나라를 비롯 일본등 동아시아 국제정세 변화에도 주목한 탁월한 선각자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시대는 물론 사후에도 한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노론 벌족인 반남 박씨 문중이면서도 당시의 지배이데올로기였던 북벌론에대항하는 북학론을 제창, 청나라를 배우자는 입장이었던 탓이다. 또 그의 문학작품 대부분이 양반과 양반 사회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폭로.풍자해 우의정과 판서를 지낸 그의 손자 박규수.박선수가 그의 문집을 간행하지 못할 정도였다. 조나단 스위프트가 '걸리버 여행기'를 통해 영국사회를 신랄히 풍자해금서취급을 당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의 문집 연암집은 금세기초에야 겨우 세상에 빛을 볼 수 있었다.

연암은 1737년(영조13년) 서울 서소문밖 반송방 야동에서 박사유와 함평이씨 사이의 2남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 박사유는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조부 박필균은 경기도 관찰사.예조 공조 참판을 거쳐 지돈령부사에 이르렀다. 박필균의 족형 박필성은 효종의 부마 금평위였고 종손인 박명원(연암의 삼종형으로 1780년 연암이 열하로 여행할 당시 사행의 정사)은 영조의 부마인 금성위였다. 쟁쟁한 집안인 셈이다.

탁월한 문필가며 사회개혁 사상가였던 연암을 이승으로 불러내 그가 살아온 내력과 그의 생각을 물어보면 무슨 말을 할까.

-결혼할 때까지 글을 배우지 않았고 조실부모해 글을 못배웠다는 설이 있습니다.

어디서 그런 얘기가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님은 제가 23세때인 1759년(영조35년)에, 아버님은 31세때인 1767년(영조43년)에 돌아가셨습니다. 16세때 전주 이씨와 결혼, 장인(이보천)으로부터 '맹자'를, 처숙인 영목당(홍문관 교리를 지낸 이양천)으로부터 '사기'를 배우면서 조금 늦게 본격적인학업을 시작한 것은 사실입니다.

-부모님이 살아계셨고 조부 또한 중요한 관직에 있었는데도 결혼이후에야뒤늦게 체계적인 공부를 한 이유가 있습니까.

조부가 벼슬살이를 하셨지만 청렴결백하고 검소해 집안일에 마음을 쓰지않았습니다. 그래서 형님과 제가 책을 펴놓고 공부할 장소가 없었습니다.(연암은 매우 엄격하고 청빈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그의 부친이 벼슬을 전혀 못했고 형수에 의해 양육된 것으로 미뤄볼 때 초년시절에는 매우 불우한 소년기를 보낸 것 같다)

-방경각외전에 수록된 작품들이 한문소설로 많이 알려져있으나 모두 실제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한 9편의 전이라는데, 창작과정을 밝혀주시지요.18~20세무렵 저는 불면증에다 식욕부진 등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 병을 다스리기위해 골동.서화등에 취미를 붙이는 한편 사람을 불러 고담과 해학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이야기꾼들로부터 들은 시정의 기이한인물이나 사건들을 기록한 것이 이 전들입니다. 북한산 봉원사에서 윤영이란이인을 만나 허생고사를 듣고 민옹전에 나오는 민유신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을 겁니다.9편의 전은 여러 사람들로부터 들은 얘기를 직접 확인하는과정을 밟아 사마천이 지은 사기 열전의 형식을 빌려 썼습니다. 물론 김신선전에 나오는 김홍기 등 몇번이나 만나려고 시도했으나 만나지 못한 사람도있습니다.

-선생의 문학론은 '법고창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선생은 초정집 서, 녹천관집 서, 영처고 서, 종북소선 자서, 소단적치인, 증좌소산인 등 여러 편의 서문과 논설에서 당시의 의고적인 문학 풍조를 신랄히 비판하면서 '창신'위주의 패관잡기류도 아울러 경계하는 절충적 견해를 제시했는데 선생의 창작방법론을 말씀해주시죠.

거울이나 물에 비친 형상이 참 모습일 수 없듯이 고문을 현대에 재현하는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고문에서 모방해야할 것은 고문의 정신이지수사가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엄연히 주권을 갖춘 문화국입니다. 그러므로구태여 한.당의 고문을 모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말을 쓰고 우리민요를노래하면 문학은 저절로 이뤄지고 거기에 진실이 담기는 법입니다. 저의 창작방법론은 병법에 비유한 '소단적치인'에 상세히 기록돼 있으니 참조하시기바랍니다.

-선생의 열하일기에는 우리 사회의 병폐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신분을 초월, 실천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사회비판의문예창조에 그치고 말았다는 후학들의 지적이 있습니다.

권력의 핵심에 근접하지 못한 저와 저의 동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현실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작품을 쓰는 것 외에는 우리가 할 수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문체반정을 일으킨 정조 임금이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한 뒤 최근의 문풍이 패관잡기류로 치닫고 있다'며 선생을 지목하여 순정문을 지어 속죄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임금으로부터 직접 그런 지시를 받은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순정문을 지어 바치진 않았습니다. 다만 남공철의 편지에 답장을 보내면서 반성한다는내용을 적어 보내기는 했으나 제 본심은 아닙니다. 이서구에게 문장에 대한비난을 받을 때는 공부가 부족해 그렇다고 답하라고 당부하기도 했습니다.연암은 1780년 5월말부터 10월말까지 5개월간의 연행을 다녀와서 열하일기를 남겼다. 그 뒤 음직으로 출사해 경상도 안의현감, 양양부사를 지낸 뒤1805년(순조5년) 6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선생의 유적과 유물은 연암집 등문집외에는 남아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묘소도 휴전선 너머 경기도 장단군송선면 대세현 선영에 있어 가볼 수가 없다. 〈조영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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