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립정부를 구성함으로써 중국에 있던 두개의 큰 독립운동 계열이 임시정부로 합류한 것이 42년10월이라고 했지만, 연이어 김원봉 계열의 조선의용대가 12월쯤 임정의 광복군으로 편입돼 들어옴으로써 군대 역시 통합을 이뤘다.이러한 군대 통합의 단초는 42년5월 중국측의 일방적 편입 명령이었다.그러나 실제 의용대가 광복군으로 편입된 것은 정치의 연립화가 이뤄진 뒤인 이해 12월이었다. 통합군 부사령관 겸 신편(신편) 광복군 제1지대 지대장으로 임명된 약산 김원봉이 이때에야 취임, 겨우 통합 조치가 완료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변모된 통합 광복군의 새 편제는 결과적으로 총사령부와 산하 3개지대(지대) 및 2개 공작대를 운영하는 형태였다. 45년3월 현재 기준 광복군규모(중국 장교 제외)는 4백50명 정도였다. 현재 대구에 생존해 있는 10여명의 독립 유공자들 역시 거의 이때의 광복군 출신들이다.
총 사령부의 규모는 중국인 장교 43명을 포함해 1백8명(45년3월 통계 기준)이었다. 그 중 장교가 56명(한국인은 13명)-사병이 52명이었다. 총사령은여전히 이청천장군(중장)이 맡았으며, 신설된 부사령에 김원봉(소장)이 취임했으나, 종전 이범석이 맡았던 참모장은 중국인(소장)으로 대체됐다.그러면서 사령부는 이해 9월 서안에서 중경으로 옮겨졌다. 중경의 새 사령부는 시내의 현재 '미원식당'이 있는 곳이었다.
제1지대는 편입된 의용대가 개편돼 구성됐다. 의용대는 주력이 월북, 남은50여명으로 1지대를 편성했다. 이때 의용대(광복군1지대) 본부는 주둔지 역시 종전의 중경 양자강 남안(남안) 손가화원 자리에서 더 골짝으로 들어간중경시 남안구 토산향(토산향) 조보촌으로 옮겨갔다. 취재팀이 찾은 이곳은산촌이었다. 단지 몇채되는 집들만이 취재팀을 맞았다. 동네 맨 앞 다 부서진 단층 기와집이 1지대 본부가 머물던 옛 그자리라고 했다. 당시 기록에 2층집이었다고 했음을 증명이라도하듯, 40대의 집주인은 "본래 6칸짜리 2층집이었으나 허물어져 단층이 됐다"고 증언해 줬다.
45년3월 당시 1지대 총원이 89명이라는 통계가 있지만 이곳 지대 본부에는45년8월 기준으로 42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는 여기서 수천리 떨어진 곳들에 2개의 구대(구대)를 형성해 파견나가 있었던 것이다.그 중 제1구대가 나가 있던 곳은 호북성(호북성) 광화현(광화현) 노하구(노하구)였다. 처음 6명으로 출발한 1구대는 병력 모으기를 통해 27명 규모로까지 성장했었다.
제2구대는 절강성(절강성) 금화(금화)에 포진하고 있었다. 역시 6명으로시작, 광복 직전에는 23명 크기가 됐던 것으로 연구돼 있다.그러나 광복군보다 훨씬 먼저 군사 행동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제1지대가 된 의용대는 광복군 다른 부대보다 발전이 적었다. 이것은 군대 및 정부 통합 이후 지도자들이 군사 행동 보다는 정치 행위에 더 매달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1지대는 머잖아 지대장마저 광복군 계열 인사들에게 넘겨 주는가 하면, 병력도 그쪽에서 충원받아 감으로써 점차 의용대 본래의 색깔을 잃었다.
광복군 제2지대는 처음 편성됐던 1-2-3-5-6 징모분처 중 1-2-5 징모처를통합해 만들어졌다. 그 중 1-2 징모처(지대와 동일)는 규모가 미미, 사실상은 5징모처를 주력으로 편성된 것이다. 5징모처는 바로 청년전지공작대였다.지대장은 이범석 장군이 맡았다. 그는 총사령부 참모장으로 있다가 개편때 중국인 장교에게 자리를 내 주고 42년10월 이곳으로 부임한 것이다.설립 당시 80명 규모였던 2지대는 본부와 3개 구대(구대장 안춘생-노태준-노복선)로 편성됐으나, 모두가 서안에 주둔하며 황하강 건너 적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계속된 초모 공작의 성과로 45년3월 현재 병력이 1백85명으로커졌고, 같은 해 4월말에는 병력이 2백50여명에 달했다. 이 2백50명 중에선80여명이 적진에 공작 나가 있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다.
종래 서안의 광복군은 사령부와 산하 부대가 모두 서안 시내 이부가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령부가 중경으로 되돌아 가자 신편(신편) 2지대도이곳을 떠나 서안 외곽의 서안시 장안현(장안현) 두곡진(두곡진)으로 옮겼다.
이곳은 서안 시내로부터 20여Km 떨어진 곳이었다. 전쟁 중이던 당시는 기존의 절간 등을 군 막사로 주로 이용했던듯, 2지대가 입주한 곳은 이곳에 있던 관제묘(관제묘)였다. 관우는 중국에서가장 중요한 신앙 대상 중 하나가돼 있어, 그를 기리는 사당(관제묘)이 곳곳에 있었고, 이곳 사당은 그 규모가 상당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곳 관제묘도헐리고 없었다. 그 자리에는 두곡 양곡창고(두곡양점)가 들어서 있었다. 관제묘와 그곳에 있던 비석은 창고 담 밖으로 옮겨져있었다. 창고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이곳에 한국군이 있었다는 얘기가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고 증언해 주고 있는 것이 지금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흔적이라면 흔적이었다.
김학규장군을 지대장으로 하는제3지대는 안휘성 부양(부양)에 주둔했다.김장군이 잘 아는 중국군 우학충장군의 부대가 그곳에 있던 것이 인연이 됐다. 앞서 얘기한 대로 3지대는 가장 늦게 출발했고 병력도 몇명 안됐었다.그러다 44년도 들어 일본군에서 탈출해 나오는 우리 청년들이 이곳으로 몰리면서 부대 규모가 70여명에 이르게 됐다. 김장군은 이들을 부근에 있던 중국사관학교에 보내 '한국 광복군 훈련반'에서 훈련 시켰다. 그 뒤 중경을 거쳐2지대로 편입시키기도 하고, 자체 충원하기도 했다. 김준엽-장준하 선생 등탈출 일본군이 바로 이 부대를 거쳐 서안 2지대로 갔다. 탈출병이 많아지면서 부대 규모도 45년3월에는 1백19명에 이르렀다.
그외 종전 3징모분처로서 강서성 상요(상요)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김문호휘하의 소규모 부대는 광복군 개편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3전구 공작대'로 활동을 계속했다. 규모는 23명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또 광복군은 중국군의 요청으로 장사 중국군 9전구 사령부로 3명의 요원을파견해 놓고 있었다. 이 지역은 종전 의용대 활동 지역이었으나 월북을 위해40년3월 떠난 뒤 한국군 활동이 끊겼었다. 하지만 이 지역은 그 뒤 일본군의대공세(장사대회전,상계작전)에 동원됐던한국 학도병 등의 탈출이 끊이지않은 지역이었다. 그 결과 이 9전구 공작대는 44년10월 이후 최대 4백명 규모로까지 커졌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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