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는증언한다-전일본군 위안부 수기(11)

대명동 우리집근처에 지금은 이름도 희미해진 친구가 한명있었다. 아마1942년7월의 어느날로 기억하는데 그 친구가 내게 "월급 많이 주는 식당이있다는데 같이 일하러갈래."하고 물었다.중국에서의 위안부생활로 심신이 만신창이가 된 나는 '이미 버린몸, 시집가기도 글렀으니 돈이나벌어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편안하게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해 가겠다고 했다. 다음날 우리 둘은 식구들 몰래 집을 빠져나와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어떻게 된일인지 부산역에 내리니 낯모르는 조선인 남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우리를 어느 여관에 데리고갔다. 그곳엔 우리외에 이미 열여섯명의 여자들이 와있었다. 그때까지만해도나는 어디 단체로 식당이나 공장으로 일하러가는 줄로만 알았다.이튿날 아침 우리 일행은 부산항에서 군용배에 올랐다. 왜 배를 타라는 걸까, 문득 불안해졌지만 혼자서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면 보국대로 가는건지도 모르지'라는 생각으로 억지로 불안감을 눌렀다. 배안에는 내또래의 여자들이 수백명이나 있었다. 부산의 여관에서 만난 18명이 한조가됐는데 그런 조가 수십개는 됐던것같다. 다른 조의 여자들에게 도대체 우리가 어디로 가게되느냐고물어보니 모두들 식당이나 공장에 돈벌러 간다고들했다.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아무래도 위안부로끌려가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심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일을 어떻게 하나… 생각만 해도 미칠것 같았다.

대만, 싱가포르를 거쳐 마침내 배는 버마(현재의 미얀마)에 도착했다. 랑군(현재의 양곤)항에 내리니 트럭들이 길게 줄을 서있었다. 조별로 모이라고한뒤 관리자들이 제비뽑기를 했다. 우리조는 만다레로 가게됐다. 얼마나 달렸을까, 트럭은 어느 외딴곳에 있는 허름한 2층 목조집앞에서 멈췄다.관리자는 우리 모두를 2층으로 가라고 했다. 거기엔 10여개의 작은 방들이있어 여자들에게 한칸씩배정됐다. 1층은 관리자가, 2층은 여자들이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예상했던대로였다. 내가 또다시 이리 되다니, 이런 기가 찰운명도 있나…. 참으로 한스럽고 답답해 가슴이 찢어지는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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