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차 전쟁이 일본에 불리하게 전개되면서 부대이동이 부쩍 심해졌고 우리도 부대를따라 자주 옮겨다녀야했다. 아키아부에서 1년정도 지낸후 우리는푸로무라는 곳으로 옮겨갔다. 그곳엔 조선인 위안부들만 있었다. 그런데 조선에서 우리를 데려왔던 관리인남자가 어느날 슬며시 사라져 버렸다. 전황이좋지않아 몰래 도망간것이라고들수근댔다. 그때부터는 군인들이 직접 밥도짓고 군표도 챙기며 위안소를 관리했다.푸로무에서 4~5개월 머문후 우리는 또다시 랑군으로 옮겨가 랑군가이칸이라는 이름의 위안소에서 지내게됐다. 우리보다 먼저 와있었던 여자들을 포함해 위안부가 30명정도 있었고, 관리인은 일본인남자였다. 여자 수가 많아져한사람당 군인들을 상대하는숫자가 적어져 지내기는 다소 수월해졌지만 대신짓궂고 포악한 남자들이 많았다.
생리때 손님을 안받는다는 이유로 마구 뺨을 때리고 발길질을 해대는가하면 한시간도 넘게 추근대는 군인도 있었고 조센삐, 조센징이라고 욕설을 하기도 해 대판 싸운적도 많았다. 한번은 술에 만취한 군인이 내방에 와서는까닭없이 살기등등하여 칼을 빼서는 행패를 부렸다. 너희들 때문에 끌려온우리에게 이럴 수 있느냐며 따졌지만 계속 나를 죽일듯이 달려들었다. 나중엔 악이 받쳐 죽기살기로 대들었다. 그러자 그가 멈칫 놀라면서 칼을 떨어뜨렸는데 얼른 칼을 집어들어 피한다는 것이 엉겁결에 그만 그의가슴팍을 찔러버렸다.
그 군인이 피를 철철 흘리면서 차에 실려나간후 나는 헌병대에 잡혀가 군사재판을 받았다. 하기야 위안부가 일본군인을 찔렀으니 살기를 기대할 수없는 일이었다. 죽기를 각오하고이렇게 항변했다. "그 칼은 적을 죽이라고천황이 하사한 칼인데 당신들을 위안하러 이 먼곳까지 온 우리같은 사람을찌르려해서야 말이 되느냐"고. 천황을 들먹인 덕분이었는지 운이 좋았는지나는 1주일만에 무사히 풀려나올 수가 있었다.
랑군가이칸에서 서너달 지낸후우리는 태국으로 옮겨졌다. 군인들을 상대하는 일 없이 대기소에서 40여일 머물다 이번에는 아유타야라는 곳으로 이동됐다. 그곳에서도 위안부생활은 하지않았고 부상병 간호를 했다. 하루 두세시간씩 맥박재기, 주사놓기, 얼음찜질 등의 기초간호교육을 받은후 각지에서후송돼온 일본군 부상병들을 간호했다.
넉달쯤 그런 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해방을 맞았다. 그후에도 곧바로 귀국할 형편이 안돼 서너달 더 머무르며 환자들을 돌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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