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개혁이끈 선조들의 슬기 (실학) -아정이덕무

아정 이덕무(1741~1793)는 조선후기 봉건질서의 해체기를 준엄하게 살다간선비이자, 문학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드높인 문인이다. 그는 영정조 실학파 문인 사가중에서 최고의 작가로 불릴만큼 실학기 문인으로 뚜렷한 족적을남긴 탁월한 존재이자 아시아 지역의 무예를 총정리 한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한 주인공이기도하다.왕실 무림군(정종의 서자) 후예로 한성 관인방 대사동에서 태어난 그는 부친성호가 조부 필익의 서자인 까닭에 평생 서얼이란 신분을 면치못하고 불우하게 지내야했다. 만년에 정조의 명으로 '성시전도'에 대한 시를 지었는데어필로 '아'자를 써주었으므로 스스로 호를 '아정'이라 불렀다. 16세에 결혼, 1남 2녀를 두었고 48세에 손자 규경('오주서종' '오주연문장전산고'를지은 실학자)을 보았다. 53세로 생을 마감한 그의 묘는 경기도 성남시 판교에 있다.

이덕무는 늘 생활이 궁핍하고 체질이 허약하여 고통속에 살았으나 불우한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어려운 생활을 조금도 불평하지않고 학문과 예술과 인생의 조화를 통해 진실을 구현하고자 노력했다. 정조 2년에는 연행사를따라 북경에 가서 중국의 문인 재사들과 교유를 통해 견문을 넓히기도 했으며 반정균 이조원 이정원등과 교류했다.

끊임없이 참된 삶을 지향하는 행보를 멈추지않던 그는 39세되던 해(1779),서출에게 동정적이었던 정조에 의해 왕립도서관인 규장각 검서관(9품)에 임명됐다. 이덕무가 가장 먼저 뽑히고 유득공·박제가·서이수가 뽑히어 '4검서'로 불리게 되었다. 신분적 한계를 지녔던 그는 15년동안 비교적 한미한벼슬이었으나 재직시 근검과 청렴으로 공무를 수행했다. 적성현감 재임(44~49세)중에는 치적이 높이 인정되어 근무평정에 해당하는 '십고'의 감사고과에서 모두 '최'의 평가를 받았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아정을 아끼던 정조는 그가 죽은후 아들 광규를 검서관에 채용하고 궁중에서 유고간행비를 대주어 1796년에 '간본 아정유고' 8권을 발간했다. 그가 생전에 저술한 '앵처고' '아정유고' '예기억' '사소절' '이목구심서' '열상방언' '입연기'등은 '청장관전서'로 묶여졌는데 원본은 전하지않고 일본인 천견윤태랑이 수집한 것을 전사한 규장각본과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의 천견문고본이 낙질본으로 전하고 있다.

아정은 자신의 삶과 문학정신을 다루는데 탁월한 면모를 보였다.'서재의 생애가 너무나 쓸쓸해/필총 옆의 파초잎도 다 없어졌네/이상하게도 내가 사흘 동안이나 시가 없어/오로봉으로 붓을 삼아 푸른 하늘에 쓰고싶네'라고 '앵처시고'에서 술회하였다. 문학에 대한 관심 집중과 왕성한 창작 욕구, 그리고 현저한 창작성과를 짐작케하는 단서이다.

한문학 전 장르에 걸쳐 창작적 재능을발휘했던 아정은 가을밤 봄바람등계절을 배경으로 청아하고 그윽한 흥취를 노래한 오언율시 151수, 현실인식이 강한 칠언율시 314수, 인간탐구를 담은 칠언절구 301수등 시편 870편을남겼는데 당대 누구보다 많은 양이며 사회의 모든 문제를 인간존재에 대한근원적 질문과 결부시키고 있다. 문학비평서인 '청비록'과 '예기억'에 실린인간 주체의 인격적인 삶을 지향한 진실한 만남의 의미와 역사적 회고의 서정을 표출하고 있다.

박지원은 아정의 행장에서 모든 문인의 글을 수용하고 능가할 수 있는 독창적 문장력을 발휘하여문장에 일가를 이루었다고 높이 평가했으며 중국의문호 이조원은 이덕무에 대하여 "청장관의 시구 만듬새는 견실 노련하며, 격조는 혼연히 절로 이루어지고, 뜻에 따라 써 나가되 속된 요염함이 없다. 사가중에서 가장 노련한 솜씨라하겠다"고 '한객건연집' 서문에 적고 있다. 실학자 유득공은 이덕무의'청비록' 서문에서 "시를 짓는 것은 누구나 할 수있지만 시를 해석하는 것은 감식력있는 사람이 아니면 안된다"면서 그런 감식력을 가진 이가 바로 아정이라고 적시했다.

아정은 북학의 색채와 강도가 남보다 두드러지지못한 반면 민족주체의식이강해 북학파중에서 박지원 박제가 연구에 밀리고, 연암문하의 한 주변인물로다뤄져왔으나 조선후기 현실대응태도가 매우 독자적이었다. 근래들어 전통유학과 실학, 자주와 북학, 자아와 세계등 서로 대립적인 사상들을 한자리에모은 인본주의자로서 이덕무에 대한 연구필요성이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아정은 다른 북학론자들처럼 중국을 유람하고 청의 문물을 배워야한다는개방적 사고를 가지면서도 춘추대의를 갖고 호족의 문명을 수용하고자했으며, 대 중국관에서 나아가 일본및 여러나라와의 교류를 통한 자국의 이익을깊이 생각하였다. 이러한 민족의식은 북학의 관점만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거시적 안목의 접근이 요구되는 진정한 민족의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북학파의 선봉장 홍대용과 문물을 중시한 두왕(영·정조) 덕분에 검서관(궁중책이나 외국책을 보고 오류를 잡거나 내용을 검토하는 연구직)이 되어수만권의 책을 섭렵한 그는 바르고 견고한 민족 주체의식위에 구습을 비판했고, 새로운 외래문화의 자극에 동요함이 없이 화해를 이뤄나갔다."대저 우리들은 조선국 사람이다. 말소리 의복 풍속 법제를 한결같이 우리나라를 따라야지 만일 초탈하여 시속을 어기려고하면 망령되거나 미친 사람이다"('이목구심서'중) 대내외적으로 혼란스런 격동기에 조선을 위해 우리가조선인임을 자각하고 조선이란 국가를 따라야한다는 민족적 주체의식의 발로이다.

이덕무는 도덕과 기강이 무너진 조선후기를 혼돈과 방종의 시기로 인식,자아의 발견과 내적 수양을 통해 사회문제를 풀어나가려는 인본주의로 일관,우리의 사회현실에 맞춘 도덕교과서 '사소절'을 현대적 안목의 인간교육을강조했다.

"시속 사람들이 글자 한자도 읽지않아 방향없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은거론할 것도 못되거니와 글을 많이 읽었다는 자들도 배운 글귀를 과거시험에만 사용하고 실천하지 않으니 애석하다"라면서 당시 지식인들이 도덕적 인간성을 상실한 채 사변적 지식에 머물고 문학적 소양도 갖추지 못했음을 탄식했다.

그는 인간사회의 부패와 질곡을 목격하고 그 근본원인이 인간자체의 한계와 모순에 있다는 각성에 도달했다. 이러한 감각의 인본주의는 현대사회의위기를 구원하는 대안으로 민족문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있다.한편 이덕무가 박제가 백동수(이덕무의 처남)등과 함께 편찬한 무예수련서'무예도보통지'는 동양3국은 물론 세계에 내놓을 자랑거리이다. 호란을 겪은뒤 강력한 북벌정책을 구상했던 효종이 죽고, 남달리 영민했던 사도세자는 '민족정기를 지켜내는 과정은 몸으로써 이루어진다'면서 무예수련의 큰 뜻을품고 무예18기(18반 무예)를 담은 '무예신보'를 편찬했다. 사도세자가 비운에 죽고, 북방정신에 입각한 정조가 18기에다가 '기창' '마상월도' '마상쌍검'등을 더 넣은 '무예도보통지' 편찬을 명했다. 정조의 명을 받은 이덕무가박제가 백동수등과 함께 중국무술과 왜검을 수용하여 적과 맞붙어 싸울때 쓰는 단병무예서로 편찬한 '무예도보통지'(1789)는 오늘날 태권도등 우리 전통무예의 원류로 인정받고 있다.

〈최미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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