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부산에서 길을걸으며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던사람이 길옆 벽오동나무가로수에 머리를 받아 뇌수술을 했으나 사망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망자의 경우는 피치못할 사정이 있었겠지만 근래 핸드폰의 범람과 함께 곳곳에서전화로 인한 꼴불견과 불쾌감을 주는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길거리에서큰소리로 통화하는 것은다반사이고 버스속이나 많은사람이 모인 백화점 공공장소에서의 큰목소리 통화, 자가용속에서 핸들을 잡고 담배까지 피워가며통화하는 장면은 꼴불견을 지나쳐 사고위험의 아슬아슬함까지 느끼게 한다.**예의 모르는 전화문화편지쓰는 습관이 사라지고 전화가 생활수단으로 바뀜에 따라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이부터 전화거는 법을 익힐만큼 전화가 보편화됐다. 그런데도 전화예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가르치지 않은채 무작정 통화교육만했기에 자라서도 전화무례가 곳곳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전화는 상대방의 모습을 보지않고 말로 의사전달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찾아가서 상의하거나 전할 것을 전화를 통해 할뿐이다. 따라서 통화는 두사람이 마주 앉아 얘기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 다만 여러사람이 이용할수 있는 기계이기 때문에 용건만 간단하게 얘기할 뿐 예의는 서로 만나서 얘기하는 것과 같다.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서 욕설을 하거나 고함을 지르는 것과 음악회 장소에서의 '삐삐'소음등은남을 괴롭히고 상대방을 볼쾌하게 하는 것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말한다. "한가지를 보면 열가지를 안다"고. 전화문화만 타락한 것이 아니다.사회전반에 걸쳐 예의는 무너지고 모두들 제멋대로다. 고리타분하고 어쩐지 나를 얽매는 것과 같은 예의는 요즘 청소년들이 알려고도 않고 알아도 모른척하는 것이다. 한 국민학교 교사의 말이 생각난다."요즈음 어린이들은 '저'라는 말이 있는줄도 모른다"는 것이다. 오직 '나'만있을뿐 어른들에게 자기를 낮춰 얘기하는 말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이성과 동성간에도 나이가 많으면 무조건 '오빠'나 '형'이다. 언어가 뒤죽박죽이되면서 염치와 예의가 사라지고 인간공동체의 해악이 날로 커져가고 있다.**내방식만 있는 몰염치
거창하게 예의나 도덕을 앞세우기에 앞서 모두들 '저'를 아는 인간이 되었으면 한다. 물질문명이 팽배하고 자본주의가 융성해지면서 모두가 자만에 빠져 나만을 알뿐 '저'를 모르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앞에서 예를 든 전화문화도 교육이전에 '저'를 안다면 남을 괴롭히고 자신도 피해를 입는 불상사가 없을 것이다. 조금의 재물과 지식 권력이 있어도 내가 최고이며 남은 아랑곳없이 뽐내며 '저'를 모르는 것이 오늘날의 사회다.
예절이란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저'라는 사고가 배어있다면 겸손과 염치가 사회에 확산되는 것이다. '저'라는 마음자세는 곧 남을 존경하고 즐겁게 하는 것이다. 인간과 동물을 명쾌하게 구분하는 기준으로 예절을 말한다. 아이들은 어른을 공경하고 어른은 아이들을사랑으로 돌본다. 동기간에 우애를 찾고 친구간에 믿음을 찾는다.**겸손과 예절 절로 확산
그런데 모두가 '저'를 잊은채 나만을 강조하며 유아독존일때 예절의 기본틀이 무너지고 사랑과 우애와 믿음이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이편하고 경박하게만 행동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지킬 것은 지키고 불편하더라도 하지말아야 할일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흔히들 "내 식대로 산다"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내방식대로의 삶이 기존의 질서를 어겨가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킬 것은 지키면서 내자신의 기본철학을 성취하는 것이 옳은 삶의 방식이다. 신세대의 '저'를 모르는, '나'만 아는 삶을 보면서 이제'저'를 아는 삶을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
〈장원익 본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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