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은 KGB로서는 가장 바쁜 한 해였다.'냉전'이 최고조에 달했을때 모스크바에서 올림픽 대회를 개최한 것은 소련의 국가안전기구들에게 커다란 시련이었다.
미국의 주도하에 서방국가들이올림픽을 보이콧했고 소련내에서도 비난의목소리가 높았다. 뮌헨올림픽에서 아랍 극단주의자들이 이스라엘 선수들에게총격 세례를 가한 사건이 아직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어 KGB요원들의 불안은가중됐다.
당시 서독의 헨셔내무장관은 비극적인 밤이 지난 다음날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에게 "당신들이 원했던 것이 이것이었나요?"라고 힐난했다. 그는 서독언론기관들이 올림픽촌의 보안조치해제를 지나치게 요구한 것을 비난했던것이다.
우리는 언제 터질지 모를 테러로 바짝 긴장했다.
이미 외국 언론에서는 테러위험에 대한 예견이 지면을 가득 채웠다. 또 이에 대한 서적들도 출판됐다.
이중에 테러를 사주하듯 자세한 방법까지 제시한 책들도 있었다. 우리가관심을 가지고 지켜본 책은 영국 MI6 전첩보요원 로버트 와츠와 미국의 제임스 파터슨이 쓴 스릴러였다. 두 책에는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겪게될 각국 선수들과 모스크바 시민들의 공포와 참화가 아주 극적으로 잘 묘사돼 있었다.살인과 폭발이 끊임없이 연결되는 전형적인 추리소설이었으나 실제 테러범들에게 묵시적인 교시를 던지는 것이었다.
파터슨의 책에는 어떤무기를 어떤 방법으로 모스크바까지 운반하여 결정적인 시기까지 어디에 보관하면 될 것인가에 대한 것도 자세히 기술하고 있었다. 또 폭탄테러를 일으키기에가장 좋은 장소와 가장 적합한 저격장소까지 자세히 묘사돼 있었다. 뮌헨사건의 피의 보복이 모스크바에서 재연되기를강하게 염원하는듯 했다.
비극적인 올림픽을 바라는 사람들은 단순히 책만 쓴 것이 아니라 테러와선동행위를 수행할 예정자를 물색했으며, 집요하게 그와 유사한 행위를 도발했다.
1980년 봄 두명의 영국인 관광객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그들중 한 사람은 영국의 왓킨슨의원이었다. 이 두사람은 지방 방첩기관의 감시하에 있던사람과 만난뒤 즉시 자신들의 일을 수행했다. '관광'을 가장한 스파이활동이예정돼 있었기에 그들은 미리 고용돼 있던 사람과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우리는 미리부터 이들을 '영접'하고 있었다. 어느날 저녁 그들은 시내로외출했다. '외국관광객'의 모습은 아주 볼품없었다. 오래되고 너덜너덜한 청바지와 더러운 스웨터를 입고 어깨위에는 무거운 가방을 메고 있었다.왓킨슨과 그의 동료는 미행을 걱정한 듯 몇시간이나 시내를 돌아다녔다.마침내 모스크바 외곽에있는 뻬로보에 도착했다. 어두운 뒷골목에서 '모스크바 친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감시하던 요원들은 이 '친구'가 카톨릭 사제라는 것을 알고 적잖게 놀랐다. (지금 그 '친구'는 유명한 정치활동가가 돼 있는 만큼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겠다). '친구'는 새로 만난 두사람을 자신의 아파트로 안내했고, 두시간가량 지난뒤 '관광객'들은 무거운 가방을 벗어 둔 채 되돌아 갔다.
무장한 KGB요원들이 아파트를 급습했을때 일단의 반역자들은 그들이 가져온 물건들을 풀어헤쳐 보고 있었다. 책과 불온비라,돈이 식탁위에 흩어져 있었다. 그들은 '모스크바 친구'들과 함께 올림픽 개막식이 열리는 운동장에서선동 활동을 벌이기고 계획하고 있었다. 폭발물과 권총을 통로에 놓아 경찰의 혼란을 야기시키고 대량의 장난감(실물과 흡사한)권총을 뿌릴 계획이었다.
메달리스트를 선동해 시상식을 망칠 준비도 시도됐다. 프랑스 선수중 한명이 대상자였는데 우리는 프랑스 선수대표단과 만나 KGB의 이름으로 바람직한소요를 자제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가장 골칫거리는 아프가니스탄출신 선수에 대한 미국의 공작이었다. 미국대사관은 그 선수를 대사관으로 데리고 가 거기서 정치적 망명을 요청하는 것으로 연극을 꾸밀 참이었다. 그렇게 되면 서방이 이야기하듯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대대적으로 비난할 수 있고,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한 미국의 명분도 서고, 올림픽 마저 망칠수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일찍부터 그 선수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서방의 테러가능성에 대한 블랙리스트에 그가 등재돼 있었다. 그 선수가 묵고 있는 선수촌 아파트부근에는 십수명의 요원이 배치됐다.
첩보가 들어왔다. 그가 양복으로 갈아입고 있다는 단순한 보고였다. 선수촌에서는 대부분 운동복이거나 아니면 가벼운 평상복차림이 어울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양복을 입고 있다는 것은 선수촌을 떠나 모스크바 어디론가중요한 곳을 방문한다는 얘기다.
잠시후 그가 조그마한 손가방까지 들고 선수촌을 걸어나오고 있었다. 무전으로 전요원들에게 '긴급'을 지시했다. 그는 뒤로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택시에 올랐다. 그뒤를 우리요원을 태운 5대의 차가 따라붙었다. 그러면서도우리는 그가 시내관광을 떠나는 것이겠지 하고 여겼다. 택시가 크렘린 광장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광장 훨씬 못미쳐 상가쪽에다 택시를 세우고 그가 내렸다. 건너편에 승용차 한대가 세워져 있었다. 머리가 쭈뼛해지는 순간이었다. 25m 뒤에서 따라가던 우리가 손쓸틈도 없이 그는 그 차에 올라타고 빠른 속도로 떠났다. 직감으로 미국대사관으로 향한다는 것을 알았다.
본부에 연락을 취하면서 우리는 급회전해 그 차를 따라 갔다. 미국 대사관에 못미쳐 차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아무런 말이 필요없었다. 우리는 차문을 열고 아프가니스탄인의 팔목을 잡아 끌고 우리차에 태웠다. 그것이 다 였다. 이 일로 미국대사관측으로부터 어떠한 항의도 받지 않았다.1985년 7월 27일부터 8월 3일까지 모스크바에서 개최됐던 전세계 청년학생축제가 개막되기 오래전부터 서방의 특수요원들은 전세계 앞에 소련이 치욕을 당하게 하기 위해 적극적인 공세를 준비했다.
아프가니스탄 반군을 모집해 소련에 침투시켜 테러를 자행하는 일이다. 이들은 CIA 전문가의 지휘하에 파키스탄에서 철저하게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축제가 개최되기 일년전 모스크바의 한 아파트를 아지트로 정하고 소련에 투입됐다.
당시 소련에서는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에게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많은 것이 면제됐다. 당국의 출입국위반사항이나 비자 기간의 만료도 용인됐다. 서방의 특수기관은 이 점을 이용한 것이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루즈니크와 마네즈광장등에 폭탄을 폭발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축제 석달전 KGB의 예리한 레이더망에걸렸고 그들과 함께 서독에서 모스크바로 들어오던 6명의 테러리스트도 체포했다.
첩보활동이 한창일 무렵 우리는 서방의 비신사적인 스파이활동을 모두 폭로할 계획을 세웠다. 세계적인 비난과 함께 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서방 특수요원들이 '민주운동'이라는 프로그램을 작성하여 우리를 앞질렀던 것이다. 민주주의 수호라는 허울좋은 슬로건 아래 소련의 인권과 반민주적행위를 고발했다. 이 프로그램은 유감스럽게도 소련내 많은 반체제 인물들에게 힘을 주었고 그들을 결집시켰다.
우리의 전술적 행태와 방법도 새로 모색됐다. 좀더 과학적이고 분석적인조직으로 교체돼야 했다. 이는 KGB의 전반적인 개혁을 요구했다.성공은 우리와 함께 있어 주지 않았던 것이다.
댓글 많은 뉴스
한동훈 이틀 연속 '소신 정치' 선언에…여당 중진들 '무모한 관종정치'
국가 위기에도 정쟁 골몰하는 野 대표, 한술 더뜨는 與 대표
비수도권 강타한 대출 규제…서울·수도권 집값 오를 동안 비수도권은 하락
[매일칼럼] 한동훈 방식은 필패한다
"김건희 특검법, 대통령 거부로 재표결 시 이탈표 더 늘 것" 박주민이 내다본 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