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재 유득공영재 유득공(1748~1807)은 발해사를 우리 국사로 체계화한 최초의 역사가이자 한학 4대가로 불리는 뛰어난 문장가이다.
발해에 대한 인식은 일찍이 서긍이 '고려도경'에서 발해를 고구려의 연장으로 설명했고, 몽고난을 겪은 여말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이를 한국사의체계에 넣어 그 성쇠를 읊기도했다.
그러나 이런 시도에는아직 발해가 한국사의 체계에 들어가야한다는 뚜렷한 이론 설명이 없었으며, 실학자 이익조차 여말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건국된 발해왕국을 한국사에서 대립적인 존재로 파악했고, 시조 대조영을 우리영토의 침입자로 규정지었다.
하지만 영재(일명 영재 고운당등으로 알려졌음)는 '발해고'(1784)에서 대담하게 이를 뿌리치고 발해사를 정리, 한국사의 틀을 새로 짰다. 그는 우리역사가 상대에서 후대로 내려오면서 웅대하던 민족의 정기가 왜소해지고, 광활하던 활동 판도가 협소해졌다고 개탄하고 있다.
"고려왕조가 발해사를 정리하여 한국사의 체계에 넣고 거란이나 여진에 대하여 옛 발해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수복을 꾀하였던들 '토문이북압록이서'를 되찾게되어 약소국의 비운을 벗어났을 것"이라고 '발해고'에서역설한 그는 남방왕조(신라 백제 고려)에 대하여 대륙적 역사의지를 지닌 북방왕조로서 고구려를 부각시켰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시까지 심심찮게 논의돼온 북벌론을 민족역사의 방향제시라는 측면으로 재정립했다."대씨(발해왕실)는 누구였던가. 고구려인이었다. 그들이 살던 땅은 어디였던가. 고구려땅이었다"라고 주장한 그는 북방계의 우리 왕조이면서 잊어버렸던 발해를 찾아 통일신라와 발해를 남북조로 정리, '남북국 시대론'을 열었다.
그는 북방계가 강렬한 발전의지를 가진 반면, 남방계는 나약하며 신라가삼국을 통일하면서 오히려 국가판도를 반도안으로 좁혀놓았다고 보았다.경북대 주보돈교수(사학)는 "만주동북부를 중심으로 연해주와 한반도 동북부에 자리잡은 해동성국으로 2백여년을 이어온 발해왕국이 고구려를 이었고,우리나라가 발해의 옛 땅을 되찾아야한다는 유득공의 발해관은 한민족에게원대한 꿈을 갖게 해서 우리 정서에 가깝게 다가서지만 '발해사'에 대한 소일 중 남북한등의 연구가 천차만별"이라고 들려준다.
소련은 연해주 일대를 차지했던 발해가 중국 한국과 관련없는 독자적인 왕조로 인식하고 있다. 발해를 중국과 떼내기위한 의도가 숨어있다. 중국은 자기네 영역의 지방정권으로 보고있다. 일본은 지정학적으로 연고를 주장할 근거는 전혀 없지만 식민통치 시절에 만주국을 세운 전력으로 인해 발해를 독자세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남북한 학계는 고구려의 연장선상에서 보고자하는 공통점이 있으나 아직 남북국 시대라는 표현을 거부하는 학자들이 더많다. 북한은 남북국시대라는 명칭이 현재의 남북한 분단상황을 상기시키는 점을 감안, 이 명칭을 쓰지않고 있다. 역사가 현실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뚜렷이 보여주는 한 대목이 아닐수 없다.
영재는 '발해고' 군고(군고) 지리고(지리고) 속국고(속국고)에서 이설과주장이 뒤섞였던 영역을 나름대로 정리하고 방대한 인용서목을 명시하였다.'지리고'에서는 '신당서'(신당서) '요사'(요사) '청일통지'(청일통지)를인용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달았는데 일부 오류도 있으나 주목할만한 것들이많다.
즉 '청일통지'에서 곽주(곽주)를 찾아내어 '신당서'에서 누락된 사실을 밝혀낸 것이라든지, 거란 태조가 발해를 병합하여 1백3개 성읍을 얻었다고 하였는데 기록에 남아있는군현은 1백13개나 되므로 이상하다고 지적, 고증학적인 태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 또 '청일통지'의 견해를 따라 발해 5경의 위치를 비정하면 동경 서경 중경 남경의 방위가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들어 의문을 제기한 것도 중요한 지적이다.
발해 창건주 대조영의아버지 진국공(걸걸중상)이 속말말갈인이라고 규정한 영재의 주장은 일견 대씨가 고구려인이라고 주장한 서문의 내용과 모순을일으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원래 고구려가 다종족국가였고, 대부분 말갈인이 고구려의 체제를따르고 관직을 받아 '고구려사람화'했던 사실로 미루어볼 때 어느정도 설득력을 지닌다.
영재는 발해왕조까지 진취적 행동적이었던 역사의지가 후대로 내려오면서점차 약화, 조선후기에는 단순한 잠재의식으로만 남게된 북방경략의 문제를겨레 앞에 다시 각성, 인식시키기위해서 '발해고'를 편술하고 '이십일도회고시'를 읊었다.
그가 31세때 틈틈이 쓴 이십일도회고시는 단군조선에서 고려까지 4천여년에 이르는 건국과 21개 도읍지를 노래한 일종의 연작시집이자 역사의 흥망성쇠속에서 긍지와 수치, 진취기상과 좌절의식를 맛보면서 주체적인 민족의식을 되새겨보려는 역사서이다.
이 작품은 연행사로 청나라에 간 박제가와 이덕무에 의하여 청나라 문사들에게 소개돼, 호평받았으며 민요풍의 가락을 지녀 어린이와 아이종들이 모두쉽게 암송했다고 전해진다.
이외에도 최초로 세시풍속을 기록한 '경도잡지'에서 중국의 캉(난방시설의일종)이 고구려의 온돌에서 비롯된 것을 밝히기도 했다. 또 옥저의 민며느리제도에 대해서 언급하였으며 단오절에 쑥떡을 해먹는 풍습이 발해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하였다. 풍속에 대한관심은 둘째 아들 본예에게 이어져 본예는서울 지리지인 '한경지략'을 저술했다.
연세대 송준호교수는 "각 시대의 지성은 투철한 역사의식을 갖고 그 민족의 역사방향을 제시해야한다. '발해고'와 '이십일도회고시'를 통해 전통체계를 올바르게 재정리하려던 유득공이야말로 그런 지성의 선구자"라고 '유득공의 시문학연구'에서 평가했다.유득공이 남긴 역사서 '발해고'(1784)가 저술된 지 2백여년을 건너뛰어 새삼 관심을 끄는 것은 내용의 다양성이나 고증의정확성같은 학문적인 성과가 아니라 우리 국사의 영역을 발해사까지 확대한그의 정열과 남다른 주체의식 때문이다.〈최미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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