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복50년 해외기획취재시리즈

**한일합방후 9년간 망명정부 있었다**1910년 나라가 망하고, 임시정부가 중국에 세워진 것은 1919년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 사이 9년간 우리에겐 망명정부조차 없었던가.미국의 방선주박사(워싱턴 D.C거주)는 다르게 보자고 충고한다. 바로 미국에 이 망명정부가 있었다는 것이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바로 그것이라는 얘기이다. '대한인국민회는 국가 인민을 대표하는 총기관이 되었도다.이제 형질상의 구한국은 망하였으나 정신상의 신한국은 바야흐로 울흥하기시작하니 어찌 희망이 깊지 아니하리오. 중앙총회는 대한국민을 총히 대표하여 가정부(가정부)의 자격을 의방하여…' 방박사가 보여준 당시 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의 논설이다.

방박사는 나아가 3.1독립선언도 바로 미국에서 촉발됐음이 확실하다고 했다. 3.1독립선언은 일본 유학생 2.8독립선언에서 자극 받은 것이나, 그 자체가 바로 미국에서의 독립청원서에 의해 고무됐다는 것이다. 이 청원서가 일본 신문들에 보도됨으로써, 미국-일본-국내로 이어지는 독립선언의 도화선에불이 타들어 가게 됐다는 얘기이다.

그런 다음 미국교포들은 광복때까지 1백만달러에서 최대 3백만달러로까지추정되는 돈을 모아 중국에 있는 임시정부에 보내 뒷받침했다고 했다. 당시3백만달러면 지금 돈으로 1억달러가 넘을 것이다. 임정의 생명줄 역할까지도맡은 것이다. 윤봉길의거 자금 역시 미국에서 보낸 돈이었다.그러면서 미국은 또 세계를 향한 우리 독립외교 전초기지였다고 했다.미국서의 독립운동이 이같이 중요한 것이라지만, 후손들이 바치는 대접은그에 걸맞지 않았다. 우선 포상받은 선열이 형편없이 적었다. 작년까지 총포상자는 6천4백89명이었지만, 미국지역 인사는 14명에 불과했다. 광복50주년이라해서 특별히 많았던 올해 전체 포상자 1천4백42명 중에서도 미주인사는 25명에 그쳤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에 기여한 선열이 겨우 39명밖에 안된다는 말인가. 선정 기준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독립운동에 관한 연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된 미주지역 독립운동사한권 나와 있지 않은 것은 차라리 괜찮았다. 연구논문조차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놀랍게도 미국지역 독립운동 연구나 자료 발굴, 기념사업 등은이제야 시작되고 있는 것 같았다.

앞에서 말한 방박사 경우가 대표적이었다. 62세인 그는 대전대(현재의 한남대) 중국사 교수로 있다가 미국에 건너가 8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우리 현대사 연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미국 문서보관소등의 자료를 발굴해 철저히자료 중심 연구를 하는 그는 연구 결과들을 최근 5~6년 사이에야 내놓기 시작했다. 이 부분 독보적 학자로 보이는 그는 이를 바탕으로 머잖아 종합적재미독립운동사를 정리해 내겠다고 했다. 그외 해방전후에서 6.25에 이르는수십권분량의 자료를 발굴, 이미 출판했으며 '한국전쟁의 기원'에 필적할6.25역사서도 내년에 출판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민 90주년에 맞춰 지난 93년도에 이미 당시 사진들을 모아 '그들의 발자취'라는 사진집을 낸 적 있는 하와이 유지들도 이민1백주년 때까지는 이민에서 독립운동까지를 모두 총괄하는 본격 1백년 역사서를 내기로 진작부터 합의해 두고 있다고 했다.

그외 거의 세상을 뜬 이민 1세대들의 얘기를 미리 현장 취재 인터뷰해 만든 '미주이민 1백년'(민병용)이란 책이 지난 86년도에 출판되기도 했다.샌프란시스코의 김도라할머니(74)는 "미국에 사는 후손들이 이제사 자신의뿌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취재팀에게 독립운동 체취가남은 구석구석을 안내하며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애쓰고, 후인들이 그때의 애국심에 관심 갖지 않음을 한탄했다. 김할머니 역시 당시를 증언하기 위해 내년에는 자서전을 내기로 했다고 한다.로스앤젤레스에서는 안형주선생(57)이 마찬가지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컴퓨터 관련 전문가이던 안씨는 뒤늦게 이 일의 중요성을 깨닫고는 미국 전역을 돌며 자료를 수집해 왔으며 내년에는 초기 이민 역추적을 위해 귀국, 일년간 연구할 계획이라 했다.

필라델피아에서도 현봉학박사(73) 등이 독립운동의 위업을 기리고 그 정신을 발현하는데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노력은 다른 쪽으로도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 LA에는 작년에 미비한대로 '한미박물관(Korean American Museum)'이 한인타운 안의 윌셔가 3333에 개관돼 자료보관 및 전시를 시작하고 있었다. 또 LA의 라디오코리아는내년 2월1일 개관 목표로 '이민역사박물관'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가수로 더 잘 알려져 있는사장 이장희씨는 "자료가 2천6백여점 모여 새 사옥으로 옮겨가 거기에 개관할 계획"이라고 했다.

올해는 광복 50주년 되는 해인 동시에 본격적 망국의 시발이었던 을사보호조약 체결 90주년이기도 하다. 이 을사조약의 위력을 국내에 사는 우리는 짐작하기 쉽잖다. 하지만 당시 미국 교민들은 망국 보다 더 살에이게 체감해야했었다.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 줄 우리 영사관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하와이로의 이민이 중단된 것도 바로 이 조약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을사조약은 사실상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촉발제가 됐고, 올해는미국지역 독립운동 시작의 90주년 되는 해가 되기도 한다. 연구나 기념사업이 이제야 본궤도에 오르고 있다는 사실은 그점에서 오히려 의미 깊어 보인다.

이런 가운데, 뜻있는 미국교포들은 또하나의 소원이 이뤄지길 바라고 있었다. 바로 망국의 상징처럼 워싱턴에 버티고 있는 구한국 공사관을 되찾는 것이다. 백악관에서 1.5km쯤 떨어진 로간 로타리(Logan Circle) 15번지에 있는이 건물은 1891년에 조선 국왕 이름으로 산 것이었다. 이완용도 근무했던 이3층 건물은 당시 돈으로 2만5천달러나 줬으나 국치일날 일본대사로 명의가넘어갔다가 이틀 후 한 미국인에게 팔려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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