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개혁이끈 선조들의 슬기 (실학-36)-오주 이규경

실학파의 서양문물도입과 사회개혁사상에 동조적이었던 정조(정조)임금이1800년6월 갑자기 승하하면서 시작된 세도정권은 집권 당파의 세력 유지에급급함으로써 실학에 대해 전시대보다 더욱 적대적이었다.여기에다 잇따른 농민반란과 통상을 요구하는 이양선(이양선)의 출몰이 잦아지자 정권유지에 불안을 느낀 집권층은 서학(서학)과 동일시되던 천주교를본격적으로 탄압함으로써 서학(서학)수용에 개방적이었던 경세치용이나 이용후생 실학파의 입지를 좁혀갔다.

이같은 시대상황에서 현실개혁보다 고증학적 방법으로 실학을 계승하려는학자들이 있었으니 실학 연구자들은 이들을 실사구시학파(실사구시학파)라이른다.

물론 전시대 경세치용이나 이용후생학파들에게 실사구시 정신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들은 전시대 확립된 이론의 근거를 비판하고 자신들의 주장 근거를 실증적으로 명시하는데 몰두하려 했다는 점에서 전시대 실학파들과 구별된다.

이같은 실사구시학파의 학문에대해 일부 실학연구자들은 사회개혁의지가거세된 쇠퇴기의 실학으로 폄하하나, 일부에서는 학문전개에 객관적 태도를도입함으로써 우리의 근대적 학문연구 태도 확립에 이바지 한 바 크다고 평가 하기도 한다.

오주(오주) 이규경(이규경, 1788~?)은 '오주연문장전산고'(오주연문장전산고)와'오주서종박물고변'(오주서종박물고변)을 저술함으로써 명필 김정희(김정희) 대동여지도를 펴낸 김정호(김정호) 사상의학의 창시자 이제마(이제마)와 함께 실사구시학파의 선구자로 손꼽힌다.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천문 역사 지리에서 부터 도교 불교 시·서화는 물론 조수(조수) 광물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와 중국, 서양의 고금사물(고금사물) 모든것에 대해 백과사전식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작가자신이 의심나거나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전거(전거)를 들어가며 고증, 정정, 변증한데 특징이 있다.

또 60권 60책으로 꾸며진 이책은 고립되고 경직된 조선 사회에 국내외의새로운 지식을 소개함으로써 국민적 사고의 각성을 꾀하려 했던 16, 17세기초기실학자 이수광 유형원의 백과사전적 저술전통을 이어받고 있어 19세기백과사전학파의 완성판으로 기록된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1,400여개 항목에 걸친 기사가 몇줄안되는 짧은글에서 부터 수백행이 넘는 기사까지 한문으로 다양하게 실려있는데 내용도우리나라 옛명칭의 유래와 국호, 지명의 잘못을 바로 잡는 것 외에 정전기발생장치나 렌즈(안경)의 종류, 바닷물의 조석간만의 원인을 밝히는가 하면서양의술에 관한 새로운 내용을 기록함으로써 우리나라 과학기술사의 보고로인정된다.

'오주서종박물고변'은 4책으로 화기(화기) 전선(전선) 전구(전구)에 관한것, 금은 동등 금속의 제련과 합금에 관한것, 옥(옥) 수정(수정) 호박 산호등 자연석에 관한것, 수은(수은) 비석(비석) 녹반(녹반)등 화학물질에 관한것에 대한 제조와 제작 방법이나 보관 판별법을 우리나라 전래의 방식과 서양의 기술을 함께 기술해 오늘날 잊혀진이방면의 연구와 당시의 산업기술실상파악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뇌법기변증설'(뇌법기변증설)과 '인체내외치상변증설'(인체내외치상변증설)은 우리나라 최초로 발전기와 서양의학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과학계에서는 큰 의미를 두고 있다.

뇌법기(뇌법기)란 바로 서양사람들이 만든 유리공모양의 정전기 발생장치로 이규경의 기록에 따르면 서울의 강이중의 집에 있는데 이것을 돌려주면불꽃이 별이 흐르듯 나오고 이를 만지면 소변을 참는듯한 자극(전기쇼크)을받는다고 했다. 그리고 이기구는 1800년전후 부산의 초량(초량)에 있던 왜관(왜관)에서 우리나라 사람에게 전해져 서울까지 올라왔으며 이 불은 서양에서는 지병을 치료하는데도 사용된다고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그러나 이 정전기 발생장치는 이웃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화란(화란)상인들과 교역을 하며 서양의 과학기술을 수용했던 난학자(난학자)들에 의해 '에레키데루'란 이름으로 1768년경에 이미 제작돼 대판(대판) 경도(경도)지역에서상품으로 팔리고 있던 것이었다. 이규경이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썼던 때가1830년대쯤으로 보면 당시 우리나라의 전기를 비롯한 서양과학기술은 일본에비해 반세기나 뒤진 것을 알수 있다.

이에 대해 과학기술사가 박성래교수는 16세기까지 만해도 선진 조선의 문물을 배워갔던 야만족 일본이 서양 과학기술을 일찍 받아들임으로써 현대문명에 앞서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로 지적한다.박교수는 "근대 과학기술에 이처럼 뒤지고서는 어느나라도 19세기 서세동점(서세동점) 식민주의화 시대에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경직된 주자학에 머물러 세계사적조류를 외면했던 선조들의 쇄국정책을 개탄했다.'인체내외치상변증설'은 뼈대 심장 간 뇌 눈동자등을 서양의학적 시각으로세부적으로 분석하고 있는데 이역시 일본인에게서 종두접종법을 배워 1854년처음으로 실시했던 점을 미뤄보면 우리나라서는 처음 소개했다는 의미이상은없다는게 전문가의 평이다.

하지만 척화양이(척화양이)사상이 팽배하고 유교적관습에 젖어 인체내부나이목구비를 논하는 것조차 야만스러운 행위로 치부되던 당시의 분위기서 이규경의 학문자세는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그는 1832년 영국의 상선이 몽금포에 정박 처음으로 통상을 요구했을때 주위의 눈총을 무릅쓰고 개시(개시)를 특허할 것을 주장하면서 조약을 엄중히 할 것을 제의, 선구자적인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규경의 백과사전적 박학다식(박학다식)은 그자신 평생 벼슬길에나서지않고 책속에서 살았던 탓도 있지만 선대 2대에 걸친 학풍의 영향 또한컸다. 할아버지이덕무가 규장각 검서로 이름난 북학파 실학자였고 아버지이광규 또한 규장각 검서로 일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주연문장전산고' 서문에서 명말(명말)에 명물도수(명물도수)의학(실학)이 우리나라에 흘러들어옴에 따라 뜻있는 선비가 마음을 다하여 다듬고 힘써 심오함을 추구하였으나 이목(이목)이 국한되어 그껍질 만을 알뿐이어서 누가 그 본원이 어디에 있는지 물을라치면 머뭇거릴 따름이다. 나 역시잘 모르긴 하지만 이학문을 좋아하여 평소에 연구한 것이 세월이 쌓이는 동안 얻은것이 있으니 모두 헤아리면 약간조가 된다'고 저작의 동기를 밝혔듯이 그는 평생을 이저술에 몰두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필사본이었던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일제말 엿장수에게 파지로 넘어간것을 최남선(최남선)이 구해내간직하고 있다가 6·25때 소실돼 버렸으나다행이 그 필사본을 복사한것이 규장각 도서에 편입돼 있어 1958년 영인본으로 출판돼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과학계에서의 높은 비중에도 불구하고 그가 숨진 연대조차 모르는 등 그의주변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최근에야 그의 저서의 번역본이 나오는등그에 대한 연구가 이제 막 시작단계이기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최종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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