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이민의 대부분이 처음엔 하와이로 갔다. 그러나 상당수는 곧 그곳을떠났다. 1910년에는 잔류자가 4천1백87명 밖에 안됐다(새로 출생한 1백7명제외).더욱이 1940년엔 이민1세들이2천3백90명(미국측 집계)으로 또 줄었다.1910~1924년 사이 9백51명이나 되는 처녀들이 결혼차 추가로 건너왔는데도그랬다. 30년 사이 상당수가 사망한 모양이었다. 대신 이곳에서 이민 2세들이 벌써 4천4백61명이나 출생해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광복운동에는 역시 이민 1세들이 열정적임을 생각하면,하와이지역 우리의광복운동 인적자원을 1905년 6천여명, 1910년 4천여명, 1940년 2천여명 등으로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이들의 이민을 추진한 것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 연합회였다. 그 관계자들이 마침 미국에 휴가 와 있던 알렌 주한공사를 찾아가 한국 인력 수입을요청했다. 한국으로 귀임한 알렌이 이를 통보하자 한국 정부는 부랴부랴 외무부 이민국 비슷한 '수민원(수민원)'을 설치해 여권을 발급하고 희망자를모집했다.
그러나 처음엔 응모자가 없었다.이때문에 미국인 목사가 설득하고 나섬으로써 기독교인이 많이 이민하게 되기도 했다. 나중 정부 파견으로 윤치호가현지에 가 3천3백66명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중 경기도 출신이 9백6명으로 가장 많고, 평안도가 6백96명, 경상도가 6백77명, 전라도가 3백35명 등으로 나타나 있기도 하다. 또 이민자 중에는 살기 힘들어 간 경우가 많고,군인출신이 적잖으며,자녀 교육 목적자도 보인다.
3년에 걸쳐 65척의 배에 나눠타고 떠났던 이들은 하와이 8개 주요 섬 중 4개섬의 30여개 농장에 수십명에서 5백여명에 이르기까지 무리지어 고용됐다.앞에서 살핀대로 이미 중국-일본 이민이 많이 와 있었으니,그들과도 어울려일했다. 막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될 당시 사진들에 일본인들과 함께 찍은 것이 많아 야릇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들은 새벽 5시30분부터 오후 4시30분까지 10시간을 일해야 했다.사탕수숫대를 베어서 공장에 실어다 주는 것이 일이었다. 사탕수수의 키가 3m가 넘고 잎이 억세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워낙 물을 많이 먹는 식물이라 논에심는 경우가 많고, 그 흙이 빨간 황토여서 저녁때 발갛게 물든 피부 상처를더운 물로 닦아내고 마사지하는 것이 일과였다고도 했다.
공장에서는 이 수숫대를 롤러로 압착해 즙을 빼낸 뒤 이 즙을 끓여 원당을만든다는 것이다. 진주만 서쪽의오아후설탕회사 한 공장을 찾았을 때 관리인은 제당 과정을 설명하면서 "한때 이 공장에서만 1천명이 일했다"고 했다.그러나 1893년에 지어졌다는 이 공장도 지난 5월 문을 닫았다고 했다. 오아후섬에는 이제 공장이 하나 밖에 안남았으나,그것 역시 내년에는 폐쇄된다고도 했다.
만약 하와이 이민이 계속됐더라면 광복운동에 더 도움이 됐을 것이다.그러나 이민은 1905년에 중단되고 말았다. 이에대해 하와이측 자료들은 "한국 정부가 멕시코 이민의 참상을 듣고 놀라 하와이 이민까지 중단시켰다"고 적고있다.
문제의 멕시코 이민은 1905년3월 배 한 척으로 단 한차례 출발했었다. 인원은 남자 8백2명과 부녀자 및 어린이 2백31명 등 총 1천33명. 그러나 그것은 악질 상인들에 의한 노예이민이었다.
5월15일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메리다 지역에 내려진 이들은 하와이보다많은 하루 12시간을 일하고도 노임은 절반밖에 받지 못했다. 일은 선인장 잎을 따 거기서 섬유를 빼 내는 것. 일이 고되어도 피할 방법이 없었다. 4년기한이 안찼다는 것이었고, 도망하다 붙잡히면 흑인 노예같이 두들겨 맞았다. 평소에도 노예로 다뤄졌다.
이같은 사정이 이들의이민 도착 2개월쯤 뒤 국내로 알려져 크게 물의가일었다. 민간단체에서 조사원을 파견하고, 정부에서는 멕시코 정부에 전보를쳤다.
그러나 전혀 도움된 것이 없었다. 다만 이들의 4년 계약기간이 끝난 1909년에야 미국 교포들이 현지에 구제요원을 보내 응급한 사안들을 해결하고,이들을 미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나섰을 뿐이다. 이를 위해 미국 교포들은 어려운 중에도 6천달러의 자금을 모으는 등 애썼다. 그러나 이마저 제대로 안돼결국 멕시코 이민은 그대로 눌러 살아야 했다. 1921년에 2백88명이 다시 쿠바로 2차 이민 하기도 했으나, 그곳에서의 생활도 크게 진전된 것은 없었다.하와이이민이 멕시코이민 충격 때문에 금지된 일면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보다 실제적으로는 1905년 우리가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상실한 때문으로 연구되고 있다.
인구 4천명의 이같은 하와이 한민족 거점에 1910년 새 피가 공급되기 시작했다. 홀로 지내던 노총각들에게 고국에서 처녀들이 시집오기 시작한 것이었다.이 결혼은 사진을 서로 보내 약속이 되면 처녀가 태평양을 건너 찾아오는방식이었다. 미국 당국이 이민 노총각들을 위해 특별히 허용한 것이 아닌가싶다. 엄청난 숫자의 동양계 청년들이 가정을 못이룬채 방황함으로써 사회문제가 됐기 때문이었다. 이 사진결혼 이민은 1924년 동양인 이민금지법이시행되기 이전까지 계속됐다.
그 14년간 하와이에 들어간 우리 신부는 9백51명에 달했다. 이들은 거의영남지역 출신이었다. 취재팀이 지난 9월 현지에 갔을 때도 생존한 사진 결혼자 천연희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올해 99살이라는 할머니는 취재팀에게 "나는 진주 사람이오"라고 또렷이 설명했다. 천할머니를 포함해 현재 하와이에 생존하고 있는 이민 1세는 18명이라고 한인회측이 일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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