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자당'이 출범 5년10개월만에 간판을 내린다.김영삼대통령이 22일 당명변경을 지시함에 따라 3당합당이후 이질적인 계파간에 반목과 갈등으로 점철된 상흔만 남긴 채 창당 5년10개월만에 간판을바꾸고 민자당이라는 당명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민자당은 지난90년1월21일 노태우대통령과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총재 김종필공화당총재가 무조건 합당을 전격 선언하면서 출범했다.88년4월 13대총선으로 형성된 '여소야대'의 4당체제에서 김대중씨의 평민당을 제외한 여야 3당이정치적 성향과 이념을 초월한 채 통합,인위적인 정계개편을 만들어 냈다.
당시 합당주역들은 '구국의 결단'으로 내세우며 새로운 정치질서 개편의당위성을 부르짖었으나 출범초반부터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당초 2백16명으로 출발한 민자당의 궤적은 출신과 배경이 전혀 다른 3개정파가 불안한 동거생활을 할 수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90년3월 당시박철언정무장관이 김영삼대표최고위원을 견제하면서 시작된계파간 갈등은 90년10월의 내각제각서 파동. 91년말의 대선후보논란을 거치면서 증폭됐고 문민정부 출범이후에도 곳곳에서 불협화음이 터져나왔다.민자당은 그러나 대통령후보를경선하는 상처를 딛고 92년12월 치러진 14대 대선에서 김영삼후보를 당선시켜 정권재창출에 성공했다.이후 민자당은 민주계중심으로 운영돼 오면서 민정계와 공화계의 불만이고조돼왔다.
지난 2월 아무런 실권없이 당의 얼굴마담역할만 하던 김종필대표가 탈당함으로써 3당합당의 축 한쪽이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김총재는 지난해12월부터 민주계가 '당의 세계화'를 구실로 자신을밀어내려는 압박을 가해오자 지난2월 자파의원들을 이끌고 민자당을 뛰쳐나가 딴 살림을 차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앞서 92년 대선직전에 노태우대통령이 중립내각을 표방하면서 탈당,1노2김의 합당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한 후 김종필대표의 탈당으로 합당구도는완전히 와해되고 만 셈이다. 계파도 민주 민정계만 남았다.민자당은 지난해 12월에도 당명변경을 추진했었다.
표면적으로는 김대통령이 새로운 국정지표로 내세운 '세계화'에 부응키 위해서는 민자당체제도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민자당은 당명을 현상공모하기도했었지만 지난2월 전당대회직전에민정계의 이탈우려와 김종필대표제거작전이라는 여론의 냉담한 반응때문에당명변경방침을 백지화했다. 다만 당기와 당가,마크만 교체했었다.그러나 이제 다시 모든 것을 바꿔야만 하는 상황이 됐다. 노전대통령의 비자금사건으로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재편여론이 높자 마침내 김대통령이 당명변경을 지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민자당은 이미 공모해둔 당명이 있기 때문에 새로 당명을 공모하지는 않을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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