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복50년 해외기획취재시리즈-미 본토 거점

미국 본토에는 한민족 거점이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주로 1905-1907년 사이, 하와이로 갔던 사람들이 옮겨 살기 시작하면서였다.

대한인국민회 조사에 의하면 하와이에 도착했던 7천2백26명 중에서 남자 1천9백99명-여자 12명 등 2천11명이 이때 본토로 갔다. 본토 이주는 더 늘 수도 있었으나, 1907년3월 동양인의 본토 이주가 금지됨으로써 중단됐다. 그뒤로 동양인은 같은 미국에 살면서도 하와이에서 본토로 가려면 비자가 있어야 하기도 했다. 이 조치는 1953년에야 풀린 것으로 돼 있다.전-장의사 첫 의열투쟁

해외 첫 의열 투쟁으로 1908년 스티븐스를 처단한 전명운-장인환 의사도하와이로 이민 갔다가 이 기간에 본토로이주한 분들이었다. 샌프란시스코터줏대감 양주은선생 등등 나중에 본토에서 이름을 남긴 대부분의 건국 선열들도 마찬가지였다.

본토에도 1910~1924년 사이 사진신부들이 찾아 들어 인구가 더 늘었다. 이쪽 결혼이민은 1백15명, 총계 2천1백26명의 본토 노동이민이 형성된 것이다.물론 본토에는 이들보다 먼저 들어가 자리 잡고 있던 사람들도 있었다. 인삼장수와 유학생들이었다. 인삼장수들은 중국인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중국인은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캘리포니아에만 1870년에 이미 6만명에 이르렀다. 주 전체 인구의 10%나 되는 규모였다.

그러나 인삼장수와 유학생을 합해야 1백명 남짓했다. 결국 하와이로부터의이주가 있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한민족 거점이 미본토에 형성되는 것이다.우리 국민이 처음 미국 땅을 밟은 것은 1883년 양국 국교 수립이 비준되기1-2년 전으로 보인다. 이때 윤치호가 유학했다는 기록이 보인다.그는 1883년부임하는 초대 미국 공사의 통역관으로 함께 귀국했다. 이해에 우리 정부도대표를 파견,민영익 일행이 미국을 3개월 가량 시찰했다. 이때 유길준이 따라가 유학한다.

그러나 이민으로는 갑신정변 뒤 망명한 서재필이 처음으로 보인다. 1885년이었다. 그 11년뒤 6명의 일본 유학생들이 미국으로 도망가 자리 잡는 것으로 이어져, 1897년 현재21명이 미국에 유학하고 있다고 주미공사는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유학 이민은 1905년까지도 70명을 넘지 못한 것으로 파악돼있다.

1910년대 유학생 증가

유학생은 1910년대 들어 증가한다. 이 기간 유학생은 5백41명으로 집계돼있다. 1916년에 유학갔던 전 서울대 장이욱총장은 "당시 미국은 한국인에게정치 망명자신분을 인정해 여권과 비자 없이도 입국시켜 줬다"고 회고했다.단 조건은 지참금 2백달러를 갖고 있어야 했다.

1921년 이후에도 유학은 가능했지만, 이때는 일본의 여권이 있어야 했다.더불어 이들에게는 영주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1929년 기준 유학생 숫자는 4백68명이었다.

본토로 들어가는 한국인은 누구 없이 모두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들어갔다.태평양 쪽에는 LA와 이곳 등 몇개 큰 도시가 있지만,이곳만이 국제항이었던모양이다. 이민국 사무소도 여기 있었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미국과 맞보고 있는 유럽인들이 미국으로 이민가는관문은 뉴욕이었다. 그곳 앞바다 엘리스(Ellis)섬에 이민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남부는 흑인 노예를 이용해 농업으로 흥했으나, 미국 북부는 이곳을 통해 들어온 유럽 이민을 이용해 공업을 일으켰었다. 그래서 '눈물의 섬'이라 불리던 이 섬은 그 후손들에게도 의미가 특별하다. 취재팀이 찾았던 지난 9월에도 자유의 여신상과 잇대어 있는 이 섬으로 가는 배를 타려는 인파가 장사진이었다.

우리에게 그와 맞먹는 곳이샌프란시스코 만(만)안에 떠있는 에인절(Angel)섬이다. 유명한 금문교와 2㎞쯤 떨어져 있는 이 섬에 1910년 이민국이 설치됐던 것이다. 전체 섬 둘레래야 8㎞ 정도. 배에서 내려 30여분 걸으니 이민자들을 붙들어 두던 수용소가 나왔다. 입구 안내판에는 "이곳은 경비가 삼엄해 감옥이나 다름 없었다"고 적혀 있었다. 2층으로 된 목조 수용소안은 다닥다닥 붙은 3층짜리 침대로 빽빽했다.

물론 1910년 이전에 도착한 이민은 다른 곳에서 입국 심사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이 기념유적으로 꾸며짐으로써 동양인 이민의 상징물이 된것이다. 우리 이민자들은 이곳에서 몇달씩 억류돼 있기도 했었다. 바다에 면한 마당에 중국인들이 세운 비석이 그같은 감회를 표현하고 있었다. '고향떠나 물길 만리 수용소에 잡혔다가, 새땅 새 하늘을 이곳에 열었노라'(별정이향표류기목옥/개천벽지창업재금문).

본토에 들어간 선인들은 어디가서 무얼하고 살았을까? 거의 캘리포니아 농촌으로 가 농장 일꾼이 됐다.

가주(가주)로 표기되는 캘리포니아는 북가주 중가주 남가주로 나뉜다. 북가주는 샌프란시스코 일대와 그 이북, 남가주는 LA일대와 그 이남을 가리킨다. 두 도시 사이는 약 5백㎞, 간단히 서울-부산 거리라고 생각하면 될듯하다. 그 중간 지역이 중가주이다.

쌀농사주류 적격일터

북가주 지역 중에서는캘리포니아 주정부가 있는 새크라멘토와 그 남쪽의스탁턴, 북쪽의 윌로우스 등에 상당수가 자리 잡았다. 이곳은 쌀농사가 성한곳, 우리 이민에게 아주적격의 일터였던 셈이다. 하와이 낯선 사탕수수 농사보다 더 익숙하기도 했을 터였다. 특히 윌로우스에서는 1920년 전후해서쌀농사 거부(거부)까지 배출, 이를 바탕으로 한민족 최초의 공군을 양성하기도 한다.

이런 직업 사정 때문에 샌프란시스코는 이민의 첫 도착지이자 북가주 중심도시이면서도 거주 중심지가 되지는 못했다. 하와이에서 사람들이 옮겨 오기전인 1902년 도산 안창호선생이 이곳에 도착할 때만 해도 당시 우리 인구는20명 정도였다. 인삼장사와 학생이 반반이었다. 또 대지진이 났던 1906년 통계로도 53명에 불과했다. 평생 이곳에 살고있는 김도라할머니는 "1965년 새이민법 이전만 해도 1백명 미만이었다"고 했다.

중가주는 남북가주보다도 훨씬 큰 농장지역이다. 지금도 미국 농산물 상당부분이 이곳에서 생산된다고 했다. 특히 과일농사가 성하다고 했다. 때문에이곳에 우리 이민 절반 이상이 자리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이 지역 중심 도시는 프레즈노(Fresno). 그 옆으로 뻗은 곡창지대에 LA에서 3백40여㎞ 떨어진 디뉴바(Dinuba)가 있고 거기서 10km 떨어져 리들리(Reedley)가 있다. 이곳들이 우리 민족의 초기 거점들이 됐다.남가주의 우리 이민 거주지도 농촌지역이었다. 적어도 초기엔 LA 시내에사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 3개월 가량 살다가 이곳으로 옮긴 도산은 LA서 1백14㎞나 떨어진 리버사이드(Riverside)에서 농사일을했다. 교포들의 생활이 제법 안정된 뒤 마련됐던 유학생양성소가 있던 곳도LA에서 64㎞ 떨어진 포모나(Pomona)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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