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12·12' 16년…마침내 심판대에

**신군부 세력·피해자 "영욕의 세월"**오는 12일로 '12·12 사건'이 발생한지 만 16년이 된다.

다시말해 국민들이 이사건의 사실규명및 관련자 사법처리에 대한 목소리를 높인지도 16년이 흘렀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도 온 나라가 16년전에 발생한 역사적 과제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해 아직까지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는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처리는 고사하고 아직 사건의 완전한 실체조차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12·12사건은 그 연속선상에서 이뤄진 5·18사건과 함께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미제사건'으로 남아있는 셈이다.

사실 5·6공 자체가 12·12를 모태로 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당시에는 실체규명을 주장하는 국민들의 목소리는 수면밑에서만 맴돌 수 밖에 없었다.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그목소리는 점차 커지기 시작했고 이같은 국민들의 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던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후 이 사건을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했다.

김대통령은 그러나 당시 정국의 혼란 등을 감안, 역사적 평가는 후세에 맡기자고 제안했다.

그 당시 '사건'이라고 일컬어졌던 이같은 김대통령의 역사적 규정에도 불구, 완전한 진실규명과 관련자 사법처리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요구는 날이갈수록 증폭됐으며 지난 93년7월 이 사건의 실체파악을 위한 검찰의 본격 수사로까지 이어지게 했다.

"우리 현대사의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수사"라는 당시 검찰수사관계자의 말을 옮기지 않더라도 이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온 국민의 관심속에 진행됐으며 수사에 소요된 기간만도 무려 1년4개월이나 걸렸다.검찰은 마침내 12·12사건 발생 15주년을 바로 앞둔 지난해 10월 종합수사결과를 발표, 12·12를 '군권을 탈취한 군사반란'이라고 규정, 우리 헌정사를 후퇴시킨 명백한 군사반란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비롯한 핵심 관련자 34명에 대해서는 '재판과정에서 과거사가 반복 거론되는 등 국론분열의 양상을 재연할수 있는 우려가 있는데다 국가발전에 기여한 점'등을 고려해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역사관적인 면에서는 12·12가 '하극상에 의한 군사반란'인 점을 분명히했으나 실질적인 면에서의 역사청산 즉 사법처리는 정치적인 상황 등의 고려로 인해 유보됐던 것이다.

12·12사건이 일단락 된 뒤 곧바로 시작된 5·18 사건에 대한 청산문제 해결도 12·12와 별로 다르지는 않았다.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법논리를 적용, 아예 역사적심판자체를 유보했던 것이다.

결국 태어난 시점만 다른 일란성 쌍둥이인 이 두 사건을 완전히 종결하지못한채 '궂은 날 신경통'처럼 언제든지 재연될 수 있는 소지를 남겨뒀던 것이다.

당시 일부 역사가들은이를 두고 무려 50년이 넘게 걸리고 있는 '해방후일제잔재청산'이나 '미완의 혁명'이라고 불리고 있는 4·19와 마찬가지로 완전종결이 이뤄지지 않은 이 두 사건으로 인해 우리 국민들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또하나의 과거청산에 몰두, 국력을 소진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했다.

이 예견이 들어맞기나 하듯 이 두사건에 대한 재수사 촉구는 재야운동권과야권뿐아니라 시민단체에 이어 교수들의 가두시위로까지 이어졌으며 노태우씨 부정축재사건이 발생하면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한계점에 이르게 됐다.정부는 결국 지난달 24일 '완전한 역사청산'을 천명했고 검찰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 스스로 거둬들였던 칼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 결과, 이미 당시 주역이던 전두환·노태우 전직 두 대통령이 영어의 몸이 됐으며 핵심관련자들도 국회의 '5·18 특별법'이라고 하는 초비상입법을통한 단죄를피할 수 없게 됐다.

미제사건이 발생 16년이 흐른 현시점에 이르러서야 겨우 완전한 종결을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그동안 이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막론하고 관련자들에게는 말그대로영욕의 세월이었다.

특히 소위 '쿠데타 진압군'이라고 불리웠던 '피해자'들은 그동안 한많은세월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최후까지 신군부측에 맞서 요즘 들어 '진짜군인'이라는 칭송까지 받고 있는 장태완 전수경사령관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겪은 뒤 풀려났으나 아버지는 화병으로 80년4월 세상을 하직한데다 서울대에다니던 아들도 82년1월 집을 나간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고통의 세월을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이밖에도 장씨와 함께 체포됐던 정병주 당시 특전사령관은 89년3월 야산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됐으며 당시 1군 사령관으로 쿠데타 발생 이틀만에보직을 빼앗겼던 김학원씨도 화병으로 세상을 떴다.

그러나 당시 연행돼 4성장군에서 일등병으로 강등된데다 내란방조죄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던 정승화 당시 육참총장을 비롯한 대다수의 피해자들은12·12및 5·18사건의 실체규명에 앞장서 오늘의 검찰수사를 이끌어 내는데큰몫을 했다.

신군부측은 당시 권력의 핵심부를 구성하며 화려한 출발을 했었으나 장세동씨(당시 수경사 30경비단장)의경우 이미 2차례나 구속되는 등 5공비리를비롯, 그때그때 정치적 상황에 따라 개인별로 상당한 부침을 거듭했으며 결국 이번에 역사의 심판대에 오르는 처지에까지 처하게 됐다.우리 근대사에서 해방, 정부수립, 4·19, 5·16등 여러차례 격변을 거치면서도 한번도 해보지 못한 과거청산, 이러한 과거가 기적과 같은 경제발전등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민주발전을 이룩하지 못하고 부정과 부패의 사슬에서벗어나지 못한 근원이라고 할때 이번에 검찰에 거는 국민들의 기대는 그만큼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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