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개혁이끈 선조들의 슬기(실학)-고산자 김정호

고산자 김정호는 영정조 이후 강하게 불어닥친 실학풍을 타고, 백두에서한라까지 우리나라의 참모습을 담은 '청구도' '대동여지도'등 한국전도를 제작했을 뿐 아니라 '지구전후도'등 세계지도의 제작과 보급에도 공헌한 과학자이다.그가 제작한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등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현대지도(5만분의 1)가 나오기 전까지 우리나라 지도의 백미로 널리 모사됐고 19세기 조선시대사를 복원하는데 가장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하지만 불과 1백수십년전 사람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겨놓은 김정호에 대한자세한 기록은 없다.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어독본'을 통해 알려진 김정호는 황해도 출신으로 서울에 올라와 남대문 밖 만리재에서 딸과 함께 살면서 가난을 무릅쓰고 대동여지도를 완성했으나 국가기밀을 누설했다고 해서지도를 압수당한뒤 옥사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병도박사는 청구도 영인본의 해제에 김정호가 옥사했다는 기록이 없고, 대동여지도가 어떤 박해를받은 흔적도 없는 것으로 보아 김정호는 옥사하지않았고, '대동여지도'도 압수당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지리학자 원경렬교수(춘천교대)는 "국가기밀을 누설한 죄인을 다루는 것은매우 중대한 사안으로 그가 옥사했다면 이러한 사실이 고종실록이나 어디엔가 기록되어있어야 할 것인데 전혀 기록이 없다"면서 역시 옥사설에 강한 의문을 나타냈다.이는 우리나라 지도자가 역사의식이 없다는 것을 퍼뜨리기위해 식민사관론자들이 날조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이상태박사는 김정호가지도제작에 앞서 기본자료로서 지지(지리서)를 발간하였고, 최한기 최성환 신헌등 유력인사가 그를 도와주었다고 밝혔으며, 지도학자 이우형씨는 대동여지도를 원본 크기로 영인본을 발간하는 등 점차 김정호 연구가 활기를 띠고 있다 (서울 중림동에 김정호기념비가 서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대동여지도 목판 11장을 추가 발견했다. 어떻든 그가 한평생 전력을 기울여 만들어낸 '청구도' '대동여지도' '대동지지'등으로 김정호는 순조 헌종 철종 고종초의 4대에 걸쳐 살았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서울에 올라온 김정호는 1822년부터 지도와 지지(지리서)에 관심을 갖기시작하여 '동국여지승람'을 근간으로 '동여지지'(1834)를 작성했고, 보완작업을 통해 '여도비지'(1851~55년경)를 제작한다. 이어 1861년 '대동여지도'를 판각하게 되며, 그후 '대동지지' 편찬에 착수, 1866년경 사망할 때까지편찬작업을 계속했다.

그의 역작 가운데 가장 먼저 완성된 것은 '청구도'로 방안법(일종의 경위선표)을 사용하였다. '청구도'로부터 약 30년후에 나온 '대동여지도'는 '청구도'의 지도적인 면을 정리, 좀더 정확성을 띠게 한 것이며 '대동지지'는 '청구도'의 지리서적인 면을 확대하고 보충한 것이다. '대동여지도'는 철종12년(1861)에 자신이 손수 판각하여 세상에 인포하고, 다시 3년후인 고종원년(1864)에 재간하여 내놓았다.

대동여지도를 오늘날의 지도와 같은 크기로 축소, 중첩시키면 가장 큰 차이가 나는 북부 산악지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역이 현대지도와 별 차이가없다. 대동여지도상의 영일만 지역을 동쪽으로 약간 이동하고 영흥만 부근을서쪽으로 옮기면 현재 지도와 거의 일치한다.

"현대적인 측량술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에 체계있게 제작한 지도여서 조선시대의 고지도로서는 가장 우수하다"고 정밀성을 밝히는 원경렬교수는 이 지도를 가지고 현재에도 국내여행이 가능할 정도라고 지리학적으로 높이 평가한다.

대동여지도의 형태적인 특색은 120이를 기준으로 남북을 22단으로 잘랐다.이것을 접으면 하나의 책과 같은 형태가 되어 휴대하기에 편리하다. 매단은80이를 기준으로 접을 수 있게 하였는데 단에 따라 1편에서 19편까지 있다.대동여지도는 매단을 한편의 크기로 접을 수 있는 '절첩식 지도'로 되어있다.

원교수는 "대동여지도가 없었다면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없어진 많은 군현의 통치조직을 전혀 복원할 수가 없다"면서 이 지도가 19세기 조선시대사를 복원하는데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말했다. 가령 경상도의 진보현은행정구역이 작긴 했지만신라 이후 1천여년간 존속했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이후 모든 지리지에 기록된 진보현의 상황은 대동여지도를 통하여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리학 분야에서도 대동여지도는 귀중한 가치가 있다. 지도학사에서 대동여지도는 조선시대까지 발달한 모든 지도를 총정리하는 의미를 갖는다. 지명분야에서도 하천이나 산맥의 명칭이 오늘날과 다른 것이 많기 때문에 현재까지 변천된 과정을 알아볼 수 있다. 안면도와 같은 도서지방이나 낙동강 금강의 하류지역, 아산만이나 경상도 북부의 소백산맥의 산록등지와 같이 지형행정구역등이 세부적으로 묘사돼있어 이들 지역이 어떻게 변천돼왔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

김정호는 '나라가 어지러울때는 적을 쳐부수고 평화시에는 정치를 해나가는데 필요한 것이 지도'라고 강조했다.

지리학자 노정식교수(대구교대 총장)는 "김정호가 국내 전도뿐 아니라 '지구전후도'등 세계지도도 만들었다"면서 '지구전후도'(1834년)가 우리나라에서 목판으로 인쇄된 최초의 세계지도라고 밝힌다.

노교수는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중간자가 최한기이고 각수만 김정호라고 기록돼 있으나후도의 좌측 하단에 '도광갑오맹추태연재중간'이라명기되어 있어 김정호가 만든 것임이 확실시된다고 주장한다. 태연재는 김정호의 당호이다. 구대륙을 전도, 신대륙을 후도로 한 동서양반구로 되어있으며 크기는 전도 후도 각각의 지름이 37.3cm정도이다.

'지구전후도'는 중국 촹팅핑의 지구도를 모방하였으나 원도처럼 양각하지않고, 음각하여 바다를 검게, 대륙과 지명표기를 백색으로 뒤바꾼 창의성을보여준다. 그리고 지도내의 주서에 옛지명을 현재는 다른 이름으로 쓰고 있다고 한 기록등으로 보아 한 자료가 아니고 여러 자료를 참고로 하여 편집한노력이 엿보인다. 경위선은 남북과 동서가 각각 18등분 되어있고, 남북회귀선과 극권이 그려져있으며, 24절기가 태양의 고도와 관련되어 지도상에 기록되어있다.

노교수는 "김정호가 경질의 대추나무를 사용, 당시까지의 어느 세계지도보다 소폭으로 판각, 서구식 세계지도의 대중적인 보급에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최미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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