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복50년 해외기획취재시리즈

**항일운동 현장을 가다-스티븐스 처단미국 본토 중부에서까지 역량 결집을 위한 '덴버회의'가 열리고 있는데,더 많은 교포가 밀집한 캘리포니아가 조용할리는 없었다.

1907년 들어 국내에서 국채보상운동이 활발하자 이곳에서도 돈을 모으기시작했다. 10월에는 국내 '제국신문'이 재정난으로 폐간 위기라는 소식에 '공립신보'가 또 모금 운동을 폈다. 1909년8월 국내 기근과 1914년 서간도 기근 때도 돈을 모아 보냈다.

무엇보다 캘리포니아 한국인의피를 들끓게 한 것은 을사늑약 폐기운동이었다. 때는 1907년. 그해 6월 헤이그로 파견됐던 이준(이준)열사 순국 소식이 7월에 캘리포니아를 뒤집어 놓은 것이었다. 즉각 본토 단체들의 공동회의가 소집됐다.

여기서 겨우 19세의 이재명의사가 을사5적 처단을 자원했다. 7월 회의에서이같은 뜻을 밝힌 그는 석달 후인 10월 귀국했다. 청운의 꿈을 품고 수만리찾아 온 미국땅을 포기하고, 이민 2년만에 조국에 몸 바치러 발길을 되돌린것이다. 평양 출생인 그는 1905년 하와이로 이민 왔다가 본토로 옮겨 공립협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었다.

이의사가 실제 이완용 처단을 도모한 것은 다시 2년 뒤인 1909년11월이었다. 기회 얻기가 쉽잖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약관의 나이임에도 불구, 2년이란 긴 세월을 보내면서도 민족의 대명(대명)을 잊지 않았다. 거사10개월 뒤인 1910년9월, 나라가 망한 바로 그즈음, 의사는 처형됐다. 겨우22세였다.

이의사 귀국 직전인 8월엔 헤이그에 파견됐던 생존 밀사 2명이 미국 땅을찾았다. 헤이그 목적이 실패하자 급히 미국 대통령을 만나 호소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이 면담을 거절, 유럽에서 활동하기 위해 곧바로되돌아갔다. 이때 본토 우리 조직들은 윤병구선생을 딸려 보내 함께 활동케했다.

11월에는 고종황제가 런던트리뷴에 늑약 무효 조칙을 실었다. 다음해 2월에는 유럽으로 갔던 이상설의사가 미국으로 되돌아 왔다. 그동안 헤이그에서이준열사를 장례 지내고프랑스-러시아-독일-영국 등을 다니면서 호소한 뒤이제 본격적으로 미국 순회를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이의사는 다음해 5월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될 때까지 15개월을 샌프란시스코 공립회관에 머물며 미국 전역을 상대로 우리 실정을 알리려 동분서주했다. 교포들의 을사(을사)병이 더욱 깊어갈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이럴 즈음, 이 모든 속열을 거대한 종기로 모아 터뜨리는 대사건이 발생했다. 스티븐스 처단이 그것이었다.

1852년생의 뒤램 화이트 스티븐스는 국무부에 들어가 주일 공사관 서기관으로 근무하다 일본 정부의 눈에 들어 한국 병합의 사냥개가 됐다. 1884년일본 외무성의 고문이 돼 바로 그해 갑신정변 뒤처리를 맡아 한국에 들어와한성조약을 체결케 했다. 한국 합병의 근거를 마련한 러일조약 때도 맹활약했다. 20년간 그러던 그는 일본에 의해 1904년에는 아예 한국의 외교 고문으로 파견돼 다음해에는 을사늑약의 기초를 놓았다. 1907년 헤이그사건이 있자고종의 퇴위를 진두 지휘한 것도 그였다.

이런 그가 1908년3월20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이상설의사가 이곳으로 되돌아 온 한달 뒤였다. 당시 미국에선 일본 이민 배척 감정이 고조되고있는데다 한국편에 서서 활동하는 헐버트-베델-매켄지 등이 일본에 비판적인여론도 조성하고 있었다. 그의 방문 목적은 그걸 무마하고 한국인의 활동을미국측이 억제토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는 것도 일정에 포함돼 있었다.

목적이 그런만큼 스티븐스는 도착하자마자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신문 등과 회견을 갖고 미국인을 속이기 시작했다. "일본이 나선 후 한국은 잘 발전하고 있으며, 따라서 대부분의 한국인은 일본을 환영하고 있다. 정권을 못쥔불만세력이나 비판하고 있을 뿐이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안그래도 속이 뒤집혀 있던 현지 한국인들이 가만 보고 있을리가 없었다.22일밤8시 각단체 긴급 합동회의가 소집됐다. 대표단이 그를 찾아가 항의,발언을 정정토록 요구키로 했다. 스티븐스가 묵었던 페어먼트호텔로 파견된대표는 미국 교포사회 지도자 최정익-문양목-정재관 등 4명이었다.그러나 스티븐스는 오히려 의기양양했다. "고종은 덕을 잃었고, 쇄국당은재산이나 가로채며, 백성은 어리석어 진작 러시아에 먹혔을 수도 있다. 이완용 같은 충신, 이등박문같은 통감이 있음을 오히려 다행으로 알라"는 것이었다.

속이 뒤집혀 주먹질이나 해주고 되돌아 온 대표들 앞에 나선 것은 전명운의사였다. 24세의 전의사는 서울 출생으로 3년전 하와이를 통해 이민와 있었다. 그는 "내가 처단해 버리겠다"고 자원했다.

다음날 아침 스티븐스는 워싱턴으로 가려고 현지 일본 총영사 소지장조의배웅 아래 샌프란시스코부두에 도착했다. 워싱턴행 기차는 샌프란시스코만건너 오클랜드역에서 출발하므로, 이곳 부두에서 4Km 정도 배를 타고 만(만)을 건너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9시30분쯤 역사적 총성이 부두를 울렸다. 우리 애국혼이 그를 처단한 것이다.

총알을 맞힌 것은 엉뚱하게도 장인환의사였다. 평양 출신으로 역시 하와이를 거쳐 이곳에 이민한 장의사는당시 32세이었다. 그 또한 전날 회의에 참석했다가 전의사의 처단 자원을 보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 혼자서 권총을 준비해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의사는 먼저 총을 쐈으나 불발하자 스티븐스를 주먹으로 공격하며 뒤엉겨 싸우고 있었다. 이 때문에 장의사의 총알이전의사도 맞춰 부상시켰다.

이 의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나 하는 것은 다음회에 살필 참이지만, 그유적들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그날을 증언하고 있는 것도 다행이다.스티븐스를 매질로 응징했던 그의 숙소 페어먼트(Fairmont)호텔은 놉힐(Nob Hill) 꼭대기, 만(만)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있었다.메이슨(Mason)가 950호. 부자촌 빅토리아식 건물들이 즐비한 곳에 있는 고색창연한 6층 빌딩. 우리 의거 불과 몇달 전에 문을 연 이 도시 최고급 호텔이었다. 로비 카펫이 너무 비싼 것이라 싶어 밟기 송구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김영삼 대통령도 이곳에 묵었다는 말에 '옛 인연을 알았다면 감회가 어땠을까?'는 생각도 스쳤다.

여기서 샌프란시스코만 쪽으로 비탈길을 내려 오면 차이나타운 및 옛 한인촌이고, 바다 있는 끝까지 내려가 만나는 건물이 부두 빌딩이다. 옛날에는태평양을 건너 온 배가 1896년에 건립된 이 빌딩을 통해 미국 대륙에 닿았다. 또 여기서 배를 타고 만을 가로질러 4㎞쯤 떨어진 오클랜드로 가야 다시대륙횡단 철도를 탈 수 있었다. 매우 중요한 교통 요충지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도시 최번화가 시장로(Market Street)도 바로 이 건물에서 시발하고있었다.

지금도 이 건물에는 큰 글씨의 'Port of San Francisco'라는 표지가 붙어있으나, 국제여객항 기능은 공항에 뺏겼고, 화물항 기능은 만 건너의 오클랜드에 넘겨줬다고 했다. 1929년 만을 가로지르는 만교(만교, Bay Bridge)가건설된 후에는 만내 부두 역할까지 상실, 부두빌딩조차 일반가게와 무역센터로 바뀌어 쓰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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