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외교로 유럽통합 주도"프랑수아 미테랑 前 프랑스대통령은 우익의 거장 드골에 맞서 사회주의의 기치를 높이 올려 프랑스를 전세계에 인상깊게 각인시켰다.그는 시라크대통령처럼 힘의 강요를 통한 강대국의 위치 확보가 아닌 진정한 평화 이념 및 공존의 논리에 의해 세계가 프랑스를 강대국으로 존경받도록 하는 정책을 펴서 호응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1916년 10월26일 프랑스 서부 자르낙태 생인 그는 프랑스의 전형적인 가톨릭및 중산층가정에서 자라났으며 파리에 유학해 대학과정을 마친다.1940년 그는 2차 대전에 참전해 부상을 입고 독일군에 포로가 된다. 미테랑은 19개월간의 수용소생활 끝에 탈출하지만 나치 독일의 괴뢰정부인 비시정권하에 참여했다는 비난을 받는 오점을 기록케 된다.이에 대해 그는 후일 당시 비시 체제는 프랑스공화국이 아닌 낯설고 다른 우발적인 체제였다고 해명했다.그러나 그는 1943년부터 44년까지 레지스탕스활동을 하게된다.
1946년 니에브르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미테랑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정계에 투신, 58년까지 내무장관, 법무장관, 해외영토장관등 11번이나 각료를 역임했다.골수 좌파인 미테랑은 드골의 노선에 반기를 들면서 좌파 통합 작업에 나서는등 사회주의 정책및 이념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게 된다.이에 따라 미테랑은 1965년 좌파 정치세력을 통합한 민주사회연맹(FGDS)당수에 선출돼 드골에게 대통령선거의 도전장을 던졌으나 2차투표에서 45.5%의 독표로 드골에 졌으며 다음 대선인 69년에는 좌파 후보로도 나서지 못하는 등 시련을 겪기도 했다.1971년 대통령선거에 나섰으나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텡대통령에게 다시 패배했다.그러나 그의 집념은 꺾이지 않아 세번째로 81년 대통령 선거에 도전한다. 기어이 그는 지스카르 데스텡대통령을 누르고야 만다.대통령 당선후 그는 공산당각료까지 입각시키는 등 미련없이 사회주의 정치를 실현하려 노력하지만 실업등 경제문제로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마침내 1986년 총선에서는 다시 우파에 패해 우파의 자크 시라크를 총리로 받아들이는등 동거정부 형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미테랑대통령은 88년 재선후 프랑스경제사정악화와 사회당의 부패 스캔들등에 휘말리면서 다시 지난 93년 총선에서 패해 우파 에두아르 발라뒤르를 총리로 하는 좌우 동거정부를 다시 구성케 되고 그는 외교 국방등 특정분야만을 전담하는 국가원수로 남아 일하다 지난해 시라크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14년간의 긴 엘리제궁생활을 끝내게 되고 이어 올들어 인생까지 마감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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