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납채(納采)의 의미와 미덕

총각 시절 지금은 농협에서 중역으로 있는 친구의 함진아비 노릇을 한 일이 있었다. 그때 그 친구는 웬일인지 주변에 많은 친구들이 있었음에도 나혼자만 불러다 함을 지웠다. 이유를 물어보기가 뭣했던데다 급하게 주문받은 일이라 그냥 신부집으로 함을 지고 갔는데 응원꾼들이 없는 탓에 혼자서 밀고 당기며 '봉투'를 뜯어 낼 형편이 못되는 바람에 '파 괴가격'수준의 함값만 받고 함을 넘겨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얇은 봉투지만 몽땅 혼자 몫이 됐으니까 떼거리로 몰려가 목돈 받은것 보다 실속은 더 있었다. 그런데 발 넓은 그 친구가 한사람만 지목해 데려가게된 이유를 신혼 몇달이 지난 뒤에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친구는 당시 처가댁의 형편이 그리 넉넉치 않았고 결혼 비용부담도 덜어주기 위해 속 깊은 사위로서, 새신랑으로서 신경을 썼던 모양이었다. 결국 함진아비 친구를 단 한명으로 감원, 임명함으로써 장모님과 처남들의 호주머니를 보살펴준 셈이었는데 요즘도 골목길에서 함진아비를 보거나 타향에 가 있는 그 친구를 가끔 만날때마다 그때의 얇지만 두터웠던 함값 봉투를 흐뭇하게 떠올리곤 한다. 원래 함진아비의 실랑이는 혼사 잔치집에서는 하나의 흥겨운 육례중의 전례다. 신부집 동네 입구에서부터 밀고 당기는 시끌벅적한 분위기 그 자체가 혼인잔치의 분위기를 훈훈하게 돋궈주는 일이니까 함진아비의 숫자가 많을수록, 함값 시비가 시끌시끌할수록 좋다고여겨왔다.

언젠가 뼈대있다는 어느 문중 잔칫집에서 이런 실화가 있었다.

한학(漢學)과 유교로 단단히 무장된 신부집에 함을 지고온 함잡이들이 한두번 실강이 하는척 시늉만 하다가 함값 봉투 몇개 받고는 금방 함을 넘겨주자 혼줄을 내줬다. 요즘같이 함값 많이 달라고 시비를 했다고 호통친게 아니라 왜 동네가 시끌시끌하게 좀더 오래 밀고 당기며 잔치 분위기를 잡지 못하고 고작 돋봉투 몇개에 녹아서 함을 5분도 안돼 넘겨줬느냐는 것이었다. 두가지의 사례를 두고 보면 전통적인 육례로서의 납채떴던 함지기와 요즘 젊은 세대 함진아비들의 변화된 풍속은 뭔가 맛이 달라졌다는 느낌이 든다. 납채의 전통적 예는 함진아비들이 함값을 받으면 반드시 그 돈을 다시 내서 술을 사오게 하여 신랑신부의 결혼을 축복하고 행복과 건강을 축원했다. 요즘 처럼 술밥대접 따로받고 함값을 술집이나 노래방에서 허투써버리는 풍속과는 의미가 달랐다. 함잡이의 복장이 따로 있 었던 옛풍습까지는 이어가지 못하더라도 납채의 전통적인 미덕과 예(禮)가 사라져가고 있음은 분명 아쉬운 일이다. 납채의 의미와 미덕의 전통이 엷어지고 옛것을 이어가고 가르치는 예절교육이 제대로 안되고 있으니까 함값때문에 목숨을 잃는 어이없는 일들이 생겨난다. 작은 사례였긴 하지만 도대체 신혼의 젊은이가 함값시비로 첫날밤에 목숨을 잃는 나라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세계화를 꿈꿀수 있을지 답답한 마음이다. 하기야 어제 메이저 수상이 한국을 방문한 예절과 자존심의 나라, 영국에서도 왕세자비가 이혼 조건 시비로 집안싸움을 할 만큼 바뀐 세상이니까 함값때문에 목숨을 잃는 일쯤은 대수롭지 않은 꺼리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번 '살인함값'사건은 요즘의 우리 젊은이들에게 이성적인 참을성과 사려깊은 마음이 덜 훈련되고 덜 교육돼 있음을 드러낸 예다. 작은 충동과 고통에 쉽게 무릎꿇고 정신력에서 지구력이 떨어진 현상은 비단 이번 함값 사건 말고도 도처에 보이고 있다. 가수들의 자살도 그런 예였다. 작은 바람에도 돛이 꺽이는 허약한 항해사에게는 드넓은 바다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 아이들중 많은 아이들은 강 하고 지혜롭지만 때로 어떤 아이들은 너무 약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컴맹세대는 친구세계에서의 외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함진아비를 한명으로 만들어 신부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줄 알지만 인터넷 수재 세대들은 신부에게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슬픈 마음이 들어도 손을 쓰지 못한다. 새로운 것만이 더좋고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신세대에게는 새것이어서 좋은 것도 가르치면서 옛것이어서 더 좋은것도 가르쳐야 한다. 우리 젊은이들에게 크고 깊은 가슴을 길러주자. 그리고 젊은 세대들도 '결혼과 수박은 어쩌다 맛있는게 걸릴때가 있다'는 스페인 속담처럼 달콤만 할 것 같던 결혼도 막상 살아보면 떫고 쓴맛이 날수 있는 확률이 더 큰 게임임을 수용하면서 살아가는 큰 마음을 배웠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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