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와 중세의 정통적인 질병관은 선사시대와는 달리 대체로 조화와 균형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한의학에서는 중국의 漢나라 무렵부터 陰陽의 조화 여부에 의해 건강과 병적상태가 좌우된다는 이론이 성립, 발달해 아직도 큰 권위를 누리고 있다.
이같은 질병관은 중국과 우리나라 등 東아시아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도에서는 베다시대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사대부조설(四人不調說)및 삼고설(三苦說)이, 고대와 중세의 유럽과 중동에서는 고대 그리스에 뿌리를 두는 사체액설(四體液說)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구체적인 모습에는 차이가 있지만 음양 또는 사체액 사이에 조화와 균형이 유지되는 경우에는 건강이 유지되지만 그것이 깨어지면 병적인 상태가 된다고 보는 점에서 대단히 공통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전통적인 질병관은 동양이든 서양이든 건강과 병적인 상태가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스펙트럼 위에 존재하는 전인적(全人的)인 것으로생각한다.
이에비해 현대의학의 질병관은 실체론적(實體論的)이다. 즉 제각각 특성을 지니는 여러가지 질병이 신체의 어떤 특정한 부위에 국소적(局所的)으로 실재(實在)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학에서는 전체로서의 인간보다는 그 인간의 몸에 실제로 자리잡고 있다고 여기는 질병이 우선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다. 반면에 한의학이나 고대와 중세의 서양의학등에서는 대개 질병보다는 인간자체가 의학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
질병관의 논리적 귀결인 치료에서도 한의학과 현대의학은 질병관 만큼이나 커다란 차이를 나타낼수 밖에 없다. 양쪽 모두 고식적인 치료보다는 근본적인 완치를 지향한다고 말하지만 그뜻은 사뭇 다르다.
현대의학에서는 질병 자체나 그 병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인자를 제거하는 것을 치료라고 한다. 예를 들면 항결핵제로 결핵균을 죽이거나 결핵이 이완된 폐부위를 제거하는 것이 근본적인 치료이다. 인체가 결핵(균)을 이겨낼 힘을 갖도록 영양제를 주사하거나 영양가있는 음식을 섭취하게 하는 것도 치료에 도움이된다고 여기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고 고식적인 방법이다.
그에 반해 한의학에서는 그러한 현대의학적 치료법을 고식적이며 지엽말단적인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현대의학과 과학이 발견한 결핵균의 존재를 부인하지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결핵이라는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는 생각하지않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우리몸의 조화가 무너진 것이 건강을 잃게 된 원인이므로 그 조화를 되찾는 길이 근본적인 치료이다. 몸을 보(補)해야 하는 것이다. 서양에서도 비슷한 생각이 근대초까지 이어졌다.
그러면 현대적인 질병관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을까.
소설 동의보감 에는 주인공 허준이 스승의 사체를 해부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과연 허준은 시체를 해부했는가. 필자는 그런 일이 없었으리라고 단언한다.그것은 현대의학은 그 특성상 해부학이 필수적이고 오늘날에는 한의과대학에서도 해부학을 가르치지만 전통한의학은 해부학과 무관한 의학체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의과대학 학생교육은 해부학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현대의학 발전의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이다. 즉 현대의학과 그 질병관은 인체해부를토대로 하여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바로 그 점이 동서고금의 여타 의학체계와크게 다른 모습을 갖게 된 출발인 것이다.
중세말과 근대초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시작된 서양의 인체 해부학은 한동안은임상의학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 17.18세기를 거치면서환자 생전의 임상소견과 사후의 부검소견이 비교되고 종합되면서 질병은 구체적으로 신체 특정부위에 자리를 잡고 있는 실체라는 새로운 질병관과 병리학이탄생했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2천여년 동안 서양의학을 거의 전대적으로 지배하던 히포크라테스-갈레노스의 사체액설과 그 의학관의 붕괴를 뜻하는 것이었다.
현대의학과 그 질병관을 탄생시키는 과정에서 인체해부학 및 병리해부학에 비교될 만큼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세균학의 성립이다.
세균학은 여러가지 전염병들의 원인을 밝혀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원인(예 콜레라균)에 의해 특정한 신체부위(예 작은창자)에 자리를 잡는 특정한질병(예 콜레라)이 발생한다는 현대적 질병관을 완성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또한 그것은 특정한 치료법(예 항생제 등 특효약)으로 특정한 질병을 치료할수 있다는 오늘날의 치료원칙을 여는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전염병을 비롯한 질병이 서식하는 신체부위는 18세기의 장기(臟器)에서 19세기에는 조직과 세포로, 20세기에 들어서는 세포내기구 및 단백질 등으로 더욱 구체화되고 있으며, 치료의 목표도 그에 걸맞게 더욱 좁혀지고 있다.
黃尙翼(서울대 의대 교수.醫史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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