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鮮展으로 불리는 조선미술전람회 는 이제까지 일제강점기 우리미술을 말살하려는 대표적 제도로 인식되고 있으나 직접적으로는 국내 일본인 미술가들의 문화욕구를 충족시키고 일본미술에의 동화를 통해 식민지통치를 원만히 하기 위한 제도로 보아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계명대 동양화과 李仲熙교수는 월간미술 최근호에 기고한 근대한국미술연구논문에서 새로 발견된 자료와 출품작 분석을 근거로 지난 21년말에 설립,해방무렵까지 23회동안 계속된 鮮展은 이보다 앞서 1918년에 발족한 조선서화협회를 견제 또는 파괴할 목적이었다는 종래 일반적인 견해와 달리 당시 한국에거주하는 일본화가나 미술애호인에게 발표의 장을 제공해주는데 주목적이 있었다 고 주장했다. 李교수는 그 이유로 이무렵 우리미술 수준이 일본미술에 비해유치하거나 낙후된 수준이어서 견제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당시 일본화가 히요시 마모루와 高羲東의 증언을 예로 들었다. 이같은 당시 미술계 상황에서 볼때 대규모 공모전인 鮮展설립의 직접적인 이유는 1910년대 미술계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고 李교수는 지적했다. 또 당시 한국에 체류하고 있던 일본인들의 미술활동이 왕성했는데 일본인 畵房등장, 일본미술도서 판매, 그룹전및 단체조직등 미술운동 발아와 츠지에이, 고바야시 만고, 고가 하루에, 이시이하쿠테이등 일본에서도 지명도가 높은 화가들의 서울작품전 개최등을 그 증거로 꼽았다. 따라서 鮮展은 장기적으로 한국을 일본에 동화시키는 문화정치 의식민지전략을 위한 분장술이었으며 鮮展을 통해 미술계 전체를 흡수, 일본미술에 동화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李교수는 결론지었다.
한편 이 논문은 鮮展창설에 일본화가 타카기 하이스이(高木背水 1877~1943)라는 인물의 개인적인 노력이 상당했다는 사실을 새롭게 지적했다. 하이스이는1919년 일본인중심의 조선양화동지회 조직을 통해 관과 연결시키는 운동의 주축으로 활동했고 제1회 鮮展에 심사위원겸 평의원으로 위촉됐으나 당대 일본서양화의 거두 쿠로다 세이키(黑田淸輝)의 입김과 작품수준의 한계등으로 2회때부터 출품자로 전락하기도 했다. 25년 일본으로 돌아간후에도 38년 17회때까지계속 출품하는등 鮮展에 애착을 가진 인물로 밝혀졌다.
〈徐琮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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