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참스승

실로 여러해 동안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모교에 봉직하기 위하여 귀국한 후연구실을 배정받던 첫날, 조달청에서 갓 빠져나온 캐비닛 하나 책상 하나만을마주보고 동그마니 앉아 있을 때도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모교 교수 정주동선생님이었다. 내가슴 속에 늘 존재하는 선생님이지만 오늘따라 이렇게 애뜻하게 그리운 것은 스승의 날 을 막 지나서인가보다.

1950년대 말, 어려운 여건하에서 집필한 한국소설사는 이 분야의 체계적 연구의효시가 되었고 방대한 분량의 청구영언을 주석 출판하셨으며 홍길동전 연구, 김시습연구 등 불후의 대작을 속속 내놓으셨다.

한번은 도청엘 들르셨는데 제자들이 모여서 선생님을 골리려고 선생님 이런시가 있던데 들어보셨습니까? 하고는 줄줄 읊었다. 공양미 삼백석에 재물이되어… 만고 효녀 심청이는 뱃전에 올라서서… 당시 요란스럽게도 불러대던 이유행가 가사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전국에 우리 선생님밖에 없었을게다. 또아직 확인은 못해 본 이야기지만, 어렵사리 집을 한채 마련하셨다. 소개인을 따라가 집 구경도 하고 집값도 치른 후 날짜가 되어 이삿짐을 싣고 가니 주인은판 일이 없다고 한다. 엉뚱한 남의 집 구경 한번 하시고는 집값 다 날리셨다.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시다 보니 세상 물정하고는 담을 쌓고 사셨다. 평생 연구만 하시다가 일찍 돌아가셨다. 그분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공부때문에 돌아가셨다고들 하였다. 큰 학자였으며 참스승이셨다. 나는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또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너무나 부족하기에 스승의 날에는 수업만 서둘러 끝내고연구실을 떠나곤 한다. 제자들의 인사와 선물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분도1960년대 초에 이 매일춘추를 집필하셨다.

〈경북대 부교수.중국어학 권택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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