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공산주의 영향받은 投爭아니다

"美 공개 기밀자료로 본-10.26서 5.18까지"

최근에 공개된 美국무부 문서 가운데는 美정부가 光州항쟁 진상과 관련해 가장 신빙성 있다고 생각하는 기록이 발견된다.

80년 7월 10일 美대사관이 국무부에 전송한 전문(문서번호 SEOUL07042)은 그 내용을 자세히 담고 있다. 이 전문에는 이 기록을 남긴 인물의 신분과 관련된 부분이 문서공개 과정에서 지워져있다. 그러나 전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인물은 당시 光州에 거주하고 있던 美國人 선교사임이 분명하다.

또한 이 전문은 그 첫 시작부분에서 이 인물이 이 지역(光州)을 오랫동안 잘 알고 있다 며소요기간 중 줄곧 光州에 머무르고 있었다 고 적고 있다.

이같은 배경을 바탕으로 美대사관은 이 선교사의 기록을 내부자 기록 이라고 명명하고 이것은지금까지 우리가 보았던 것 가운데 가장 균형있는 사태 기록이며 분석이다 고 평했다.이와함께 美대사관은 그에 앞서 보냈던 光州관련 보고서를 이 기록으로 대체해달라고 요구했다.따라서 이 기록은 5.18이후 美정부가 光州항쟁을 인식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중요문건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선교사의 기록은 光州 5.18사건 회고 라는 제목을 갖고 있었다. 이 선교사는 공수부대가 단순히 길을 걸어가는 젊은이들에게 이유없는 공격을 가했다고 전하고 머리가 헝클어진 채 술에 취해 음식을 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군인들을 목격했다 고 전했다.

무엇보다 이 선교사는 기록 곳곳에서 光州항쟁은 결코 공산주의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분명하다 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공수부대가 光州시내에서 폭력을 휘두를 때 말고는 시민들 사이에 어떠한 폭력이나 폭동 행위도 없었다 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마침내 그는 5.18사건의 나날 동안 나의 韓國친구들에게 느꼈던 것처럼 내 생애에 그렇게 놀라운 자부심을 느꼈던 것은 처음이었다 고 술회하기에 이르렀다.

이 기록 내용을 전하고 있는 美대사관 전문은 그 중요성에 비춰 주요내용을 전재할 만한 가치가충분하다.

▲5월 16일, 大田으로 가려고 했던 선교사들은 버스표가 완전히 매진됐음을 알게됐다. 그들은 군인들이 대전으로 가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들은 이튿날 기차로 갔는데,그 기차에는 대규모의 사병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의 행동은 점점 무질서해져 민간 여행객들에게 육체적 위협을가하기도 했다. 심지어 병사들 사이에는 피를 흘리는 경우도 생겼다. 장교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光州 선교사들은 5월 18일 일요일에 언제 어떻게해서 사태가 폭력적으로 변했는지 알지 못한다. (중략) 일요일 어느 시점엔가 공수부대 병사들이 시내에 나타났다. 일부는 오전 9시라고 말하고 또다른 사람들은 정오라고 말한다. 일요일 오후에 공수부대 요원들의 젊은이들에 대한 이유없는 공격이 시작됐다. 여러 사건들이 직접 목격됐다. 그 전에 어떤 소요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단순히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에 대한 크고 작은 잔혹한 공격이 목격됐다.▲후에 어떤 한국 경찰이 공수부대 병사가 어떤 사람을 공격하는 것을 말리려고 하다가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들렸다.그러나 증거는 없다.(이름 삭제)는 교차로에서 교통경찰과 공수부대 병사가서로 다투는 것을 보았다. 병사는 택시로부터 분명히 젊은 여자를 끌어내려고 했으며 교통경찰은병사가 택시를 그냥 보내주기를 원했다. (그 선교사는 그 결과를 보지 못했다. 그는 계속 앞으로걸어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또다른 목격자는 다른 공수부대 병사들이 지난 16일 大田행 기차에서의 병사들처럼 군기가 문란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았다. 또한 조선대학교를 지키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병사들은 머리가헝클어지고 분명히 술에 취했으며 음식을 달라고 소리지르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병사들이 의도적으로 굶주렸다는 소문이 많이 퍼져있다. 일부는 여기에 그들에게 술이 주어졌으며 심지어 마약을 먹여 그들을 거칠게 만들었다고도 한다)

▲평화봉사단들은 이때 일종의 비폭력 저항으로 선의의 미국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어떤 사람이 두들겨 맞고 있는 것을 본 한 평화봉사단은 그 사람에게 가서 두팔로 감싸 더이상 때리지 못하게 했다. 그런 경우 공격자는 그 희생자를 버려두고는 다른 희생자를 골랐다. 그러면 평화봉사단도 차근차근 쫓아가 그 사람들을 팔로 감쌌다.

▲우리는 공수부대 병력이 학생들을 공격했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 어떤 폭력적이거나 폭동 형태의 시위에 대해 듣지 못했다. 그 소식이 퍼진 후로는 비폭력 시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도시로부터 법과 질서의 힘이 철수한 후로 우리는 또다시 어떤 폭력적이거나 폭동 행위에대해 듣지 못했다. 우리는 절도나 개인적 폭력이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가정을 증명할 어떤 데이타도 갖지 못한다. 예를들어 마이애미나 美國의 도시 폭동과 같이 약탈이나 무법행위는 분명히 절대로 없었다. 다만 군병사들이 시위를 진압하려고 시도했을 때만은 예외였다.

▲수요일(21일) 아침은 놀라웠다. 경찰과 군인들이 시야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밖에나온 모든 시민들이 학생들에게 환호를 보내고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알 수없는, 조심스럽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시민들을 제외하고 모든 도시는 혼연일체가 돼 학생들의항거를 받아들였다. 이같은 관점에서 5.18사건은 光州시민의 일임이 분명하며 학생들만의 일로 설명돼서는 안될 것이다.

▲소문에 따르면 목요일(22일)밤에 (군병력이)도시를 점령할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밤 11시부터12시30분까지 필자의 가족들은 소형병기보다 더 큰 무기들을 포함한 지속적이고 대규모인 총성을들었다.

▲금요일(23일) 아침 우리 한 가족은 두사람의 사복 차림의 병사들이 우리 동네 언덕을 지나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그들도 그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도시 점령은 월요일(26일)밤에 이뤄졌다. 더욱 정확히 말해 5월 27일 화요일 이른 새벽이었다.군작전은 신속하고 간단했다. 이때의 총성은 목요일에 들었던 매우 시끄러운 소리에 비해 훨씬덜했다.

▲5.18사건은 공산주의가 침투했거나 그에의해 고무됐거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도시를 재점령했던 군인들은 그들이 공산주의 폭동을 진압하고 있다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들었다. 사태판단은 간과됐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군인들의 이같은 잘못된 정보는 지극히 불행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선교사는 날짜 순으로 사태의 개황을 술회한 뒤 光州항쟁과 관련해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점 을 강조했다.

그는 光州는 결코 폭동으로 찢긴 도시가 아니었다 며 이 도시는 혼란 속에 있지 않았고 시민들은 소위 폭도들로부터의 위험 속에 있지 않았다 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光州는 학생들이나 재야인사들에 의해 위험하게 점령된 도시가 아니었다 고 전제한뒤 이는 위기 속에 단합된 도시였다 고 적었다.

그러나 당시 권력장악에 나선 全斗煥이 갖고 있던 光州항쟁에 대한 견해는 이 선교사의 감동적인술회와는 전혀 딴 판이었다.

그러나 美당국은 光州항쟁을 계기로 12.12 이후 한때 위험수위까지 올라갔던 韓國군부내의 全斗煥에 대한 불만이 수그러들었다고 판단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光州항쟁 이후 韓國내 정황에 대한 분석을 담은 6월 7일자 전문에서 韓國군부내 동향과 관련 5월17일 정치적 과잉행위와 全장군의 정치적 야심에 대한 불만이 산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 적은 뒤 체제가 흔들리면 이같은 불만은 더 커질 것이지만 光州사건은 최소한일시적으로 육군을 단합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고 타전하고 있는 것이다.

美당국은 또한 光州항쟁이 진압된 후에도 韓國군 특수부대들의 이동상황을 계속 파악하고 있었다. 6월6일자 전문에는 光州항쟁을 전후해 이동 배치됐던 공수부대의 이동상황에 대해 통상 光州에 있으면서 그곳에 계속 남아있는 제7여단을 제외한 특전여단들은 서울로 돌아왔다 며 대부분 서울지역 대학 캠퍼스 내의 숙소를 차지하고 있으며 훈련소에 있는 3여단만 예외다 라고 적고있다.

이어 전문은 光州에 있는 제7여단의 한 대대는 산악지대로 숨은 것으로 믿어지는 무장폭도들에대비해 경계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고된다 고 덧붙이고 있다.

〈워싱턴.孔薰義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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