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지증왕代에 식읍제"신라의 食邑制는 금관가야가 망하고 그 왕이 항복해오자 김해지역을 식읍으로 준 법흥왕(신라 23대) 19년(532년)이 가장 빠르다는 통설과는 달리 지증왕(22대)이 後妃 몸에서 난 왕자에게 薛땅을식읍으로 내려준 51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주장이 나왔다.
계명대 사학과 盧重國교수는 8일 경북대에서 열릴 한국고대사연구회에 발표할 논문 설요묘지명의 검토-신라의 薛氏와 식읍 에서 신라의 식읍이 항복해온 왕에 대한 예우나 軍功을 세운 고위관료들에 대한 논공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왕자도 식읍을 받았음이 확인된다고 밝혔다.이 묘지명에는 설요의 아버지 薛永沖이 김인문과 함께 입당, 대장군까지 올라가는 활약상을 보였고, 이 薛氏는 薛땅을 식읍받은 신라왕자가 그 지명을 따서 성을 붙인데서 유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설씨는 왕족출신이지만 신라 6부성의 설씨는 압독국의 왕족집단과 관련, 두 설씨는 성은 같아도 실제는 다르다 는 盧교수는 설영충의 曾祖와 祖는 金王의 貴臣大人 으로 표기, 이 가문이진골출신의 귀족가문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대대로 왕실과 혼인했다고 주장한다. 신라의 첫 화랑이었던 薛原郞이 설씨라는 이유로 육두품으로 보기도 하지만 진골출신만 화랑이될 수 있고, 설씨의 조상이 신라왕자였음을 상기할때 설원랑은 진골 이라고 밝힌 그는 설원랑이설영충의 高祖라고 추론한다.
그러나 설영충의 가문은 아버지대에서부터 기울어 육두품으로 강등됐으며 왕실에서 갈라져나온가문의 지위가 격하되는 사례는 백제 흑치상지 가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나라의 陳子昻이 지은 설요묘지명 은 한치윤이 쓴 해동역사 에 소개돼있고, 계명대 이종문교수 등 한문학자들은 이 묘지명에 실린 返俗謠에 대해 연구해왔으나 신라사에 원용되기는 처음이다.
崔美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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