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민족통일대구시청년협의회 공동주최"일제강제 징용으로 고난과 역경으로 점철된 50여년의 세월을 살아온 사할린 교포와 광복 51돌의의미를 되새기기위한 사할린 학술대회가 16일 러시아 사할린주 유즈노사할린스크시 로지나회관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매일신문과 민족통일대구시청년협의회 공동주최로 열린 학술대회에는 사할린 새고려신문사, 사할린 한국어방송국 관계자들과 경북대한국교민연구소 이정희.배한동교수가 참가, 사할린 한인들의운명과 소망 에 대한 심도있는 학술토론을 벌였다.
다음은 학술대회 참가자들의 발표요지.
▲ 1890년부터 해방전인 45년8월까지 사할린주 한인들의 삶 =새고려신문사(러시아내 유일한 한글신문) 이한동부사장
일제침략으로 경제.정치적으로 위협을 느낀 조선인들이 1890년대부터 사할린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특히 1910년이후 사할린북부 알렉산드롭스크시에 25가호 가량의 조선인부락이 최초로 형성, 1925년에는 북부사할린에만 1천4백31명의 한인이 살았다는 사실이 자료로 밝혀졌다.이후 북부사할린은 32년에 3천2백여명으로 한인인구가 늘어났으나 한인들의 노임은 차별대우로일본인.러시아인의 60%%에 불과했으며 찬바람이 새어드는 좁은 판자집에서 수십명이 한꺼번에 빽빽이 누워 잠을 자야할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했다.
한편 30년대 후반 소련첩보기관이 한인들을 일제의 간첩 국제부르조아앞잡이 테러분자 로규정, 수백여명이 체포돼 사형되거나 옥중에서 숨지는 사태로 북부사할린의 한인인구는 급격히감소되었다.
통계자료부족으로 정확한 인원은 알 수 없으나 일본인 변호사 다카이 겐이치조사에 따르면 사할린에 6만여명의 노무자가 모집(강제징용)됐으며 특히 한인들은 석탄탄광에서 목숨만을 부지하는비참한 노무자생활을 강요당했다.
43년에만 갱내사고로 1백54명이 사망하고 5천9백여명이 부상당한 사실이 통계로 밝혀져 39년부터45년까지 계속된 한인 강제징용 희생자는 엄청날 것으로 추정된다.
▲ 45년이후 사할린 교포 2, 3세들의 운명과 소망 =김종수 한국어방송국 부국장48년부터 69년까지 21년동안 6천4백14명 한인들이 계속된 차별대우로 소련국적을 받았다. 52년당시 사할린주내에 87개소 한인학교가 있었으며 포로나이스크 사범전문학교내 조선어과가 생기기도했으나 65년 소비에트정부의 명령에 따라 한인학교전부가 폐교를 당했다.
88년 통계에 따르면 사할린거주 한인 3만5천명중 3만2천정도가 소련국적을 가지고있으며 4백56명이 북한국적, 2천61명이 무국적자인 것으로 밝혔졌다. 또 사할린 한인중 30%%인 1만2천9백명만이한국어를 모국어로 여기고있으며 나머지 3분의 2는 러시아를 모국으로 생각하고 있다.▲ 한국정부의 교민정책과 교민의 역할 =이정희 경북대한국교민연구소장
현 정부는 재외국민 지원강화를 위해 △교포들의 불편해소를 위한 법적.제도적 개선방안 강구 △교포들의 거주국가내 사회적 지위향상을 위한 지원확대 △사회주의 국가 거주교포들의 모국방문확대와 모국어.전통문화 확산지원등을 기본방향으로 설정하고 있다.
▲ 세계화시대의 한국의 위상 =배한동 경북대교수
일제로부터 해방50년이 지나 한국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가 넘었다. 이제 중진국의 굴레를 벗고 선진국문턱에서 새로운 도약을 모색하고있다. 그러나 사회병리현상과 문화적인 후진성 극복없이 선진국 진입은 힘든 실정이다.각 국민들의 의식개혁과 가치관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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