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柳宗鎬 칼럼

"왜 우리말을 버리는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로 시작되는 애조의 군가를 들으면서감회를 느끼는 사람들의 수효는 점점 적어지고 있을 것이다. 연보라 구절초나들국화가 한껏 피어 있던 50년 9.28 수복 무렵부터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이 노래는 6.25세대만의 노래는 아니다. 60년 4.19때 시위 학생들이 불렀던 노래도 바로 이 군가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그때만 하더라도 함께 부를 노래가 아주 적었던 것 같다.

느닷없이 흘러간 노래의 가사를 들먹이는 것은 최근 공비 소탕작전 소식과 함께 사체(死體) 란 말을 너무 자주 듣게 되고 어떤 거부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낱말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란 것은 사람마다 다르게 마련이다. 좋아하는음식이나 색깔이 사람마다 다르듯이 싫어하는 낱말이나 정치인도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불길한 것을 지칭하는 낱말은 그 자체로서도 유쾌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체 에 대한 나의 거부감은 이러한 지칭성에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앞에 노래말에서도 알수 있듯이 우리는 어디까지나 시체(屍體) 란 말을 써왔다.그러던 것이 어느 사이에 시체가 사체가 되어 날라온 돌이 박힌 돌을 몰아낸결과가 되었다. 텔레비전의 뉴스나 신문에서는 이제 사체 가 표준형이 되다시피 하였다.

심각한 외래어 침투

본시 우리쪽에서는 시체 라는 것이 통상적 용법이었다. 그런데 일본에서 간략히 표기하기 위해서 시체 를 사체 로 표기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저들의한자 표기 간소화 운동의 일환이었다. (우리와는 달리 시체 나 사체 나 일어의 음독은 매한가지가 된다.) 그리하여 우리쪽에서 그대로 흉내내어 어느 사이에 사체라고 하는 것이 표준이 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벌써 오래전 일이지만 사법연수원에서 일본의 판례집(判例集)을 연수 교제로 사용한다는 얘기를들은 적이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일본의 법령 관계 서적등을 통해 우리 법률용어로 굳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시정해야할 사안이라 생각된다.

말이란 것은 자꾸 변하게 마련이고 인위적으로 변화를 방지할 수는 없다. 또이른바 오용이라는 것도 언어의 자연스러운 일면이어서 한사코 배격만 하는 것도 언어 순수주의라는 위험을 안게 된다. 나날이 좁아져 가는 세계속에서 문화의 교류가 일상사가 되어있는 오늘날 외래어나 귀화어(歸化語)를 무조건 배격하는 것이 좋은 일도 아니고 또 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유서깊고 반듯한우리말이 있는데도 이를 버리고 남이 쓰는 말을 흉내내어 쓴다는 것은 어떠한관점에서도 정당화 될수가 없다. 늘 쓰는 말이 너무나 익숙해서 무언가 새맛을내기위해 안쓰는 말을 쓸수도 있다. 특히 일상언어가 아닌 문학언어의 경우 이렇게 새맛을 찾는 것은 당연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앞의 경우에는 변호할 길이없다. 익사체 란 말도 있으니 사체가 자연스럽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벌써 오용에 중독된 탓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언론인들 반성부터

흔히 신문기사에서 접하게 되는 말에 물밑 대화 라든가 발빠른 행보를 보여준다 라는 것이 있다. 처음 접했을 때 아마도 한글세대가 만들어낸 새말이려니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일본 신문에서 많이 쓰이는 것임을 알고 적지 아니 실망했고 또 창피한 느낌까지 들었다. 과학 기술면에서 혹모자라고 떨어진다면 전후사정으로 보아 이해가 되지만 일상적으로 쓰는 말까지 아직도 그들을 본뜬다는 것은 무어라 변명할 여지가 없다.

변화가 언어의 속성이라고 해서 말의 변화를 그냥 방치해 둘 수는 없다. 모든나라가 국어교육을 실시하는 것은 자기 나라말을 반듯하게 쓰고 올바르게 계승하여 민족적 정체성을 확보하자는 뜻에서이다. 한자라는 공통성때문에 한자어는 모두 우리말이라는 착각을 하기가 쉽다. 없는 말을 빌려 쓰는 것은 할수 없지만 어엿한 우리말을 버리고 외방(外邦)말을 수입해 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특히 언론방송분야 종사자의 반성이 요청된다.

( 外邦 말이란 일제시대 우리 시인들이 일본어를 가리킨 말임)

〈연세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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