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남평문씨(南平文氏)세거지. 인흥(仁興)마을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대구근교에서 조선 말기의 양반들이 살았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다.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화촬영 장소로도 유명하다. '씨받이' '황진이'를 찍을때는촬영팀이 종가에서 2개월 동안 머문적도 있다.
대구에서 화원읍으로 들어가 달성중학교를 지나기전 왼쪽도로를 따라 2㎞쯤 가면 왼쪽 산자락에전통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천수봉 자락밑에 위치한 문씨마을은 천내천을 앞에두고 다소곳이 앉은 함박산을 마주한 전형적인배산임수형의 길지다.
인흥마을은 동쪽의 마을 산줄기가 인(仁)자 모양으로 동네를 감싸고 있으며 동남쪽에 솟은 높은산이 흥(興)자 형태를 보여 인흥이라 불렀다는 설과 고려때 대찰인 인흥사가 이곳에 자리잡아 마을 이름을 인흥으로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인흥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마을 수호신 서낭당(城隍堂)이 맞이한다. 서낭당 왼쪽으로 보면 수백년묵은 고목사이로 조선말기의 대.소 기와집 9가구와 별당으로 지은 정자 2채 등이 자태를 뽐낸다.전부 54동인 이들 기와집은 영남지방의 전통적 양반가옥의 틀을 지니고 있다.
천연보호림으로 지정되어 있는 적송(赤松)은 마을을 감싸면서 마을의 풍치를 높여준다. 마을바로앞에 조각자나무와 보호수인 전나무가 고품을 뽐내며 객들을 내려본다. 이것 뿐만아니라 가옥내정원이나 토담사이마다 수십년~수백년 묵은 아름드리 고목들이 들어서 고택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건물이 수봉정사(壽峰精舍)다. 마을을 찾는 손님을 접대하고 문중의 대.소사를 의논하던 곳으로 조선시대 별당양식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마당 좌측에는 삼각형형태로 땅을 돋우고 경계를 자연석으로 하여 작은 정원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백일홍, 향남, 소나무를 심어 마당안쪽으로 둥그렇게 지면을 돋워 심겨진 커다란 소나무 두그루가 수봉정사를 굽어보고 있다.
이 수봉정사에는 영남최초의 문중도서관인 인수문고가 있다. 역학 의학 등 주제별로 1만여권의고서가 오동나무 책함속에 잘 정리되어 있고 목판도 진열돼 있다. 당송팔자백선(정조 5년), 대학연의보(1492년), 주자어류대전 50권등 중요한 서책이 많다. 관리인은 지금도 유림이나 대학 연구원들이 들러 자료를 이용하고 있다고 전한다.
2.5m가 넘는 토담을 걸으며 오른편 마을끝에 다다르면 조선 고종 9년(1873년) 건립된 광거당(廣居堂)이 옛날의 북적거림을 그리워하듯 한적한 모습으로 서있다.
유학자 수봉 문영박선생(1880~1930)이 살았던 정자 용호재를 1925년 고쳐 지은 광거당은 문중자제들의 학문과 품위를 쌓게 하였던 곳이다. 2층으로 된 누각형 기와집으로 뒤뜰에 우거진 대숲과어우러져 아름다움을 한층 더한다.
대문간을 들어서면 관리사 살림공간에서 광거당이 보이지 않도록 차면담이 설치되어 있고 대문간옆에 우물이 배치된 독특한 구조를 보하고있다.
종손 문정기씨 가옥 등 많은 고택도 정원, 주춧돌, 창호, 대문채 등 각각의 특색을 갖고 있어 한번쯤 들러보면 수백년전의 옛날로 돌아가 그윽한 맛을 느낄수 있다.
인흥마을 맞은편 산기슭에는 명심보감을 지은 노당 추적선생을 모신 인흥서원과 고려 충렬왕때의문신인 추적선생의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가 팔작집 비각안에 보존되어 있다.
수만여평에 달했다고 전하는 인흥사터가 지금은 흔적조차 없고 본리동 삼층석탑으로 불리는 석탑1기가 수봉정사 앞 대추밭에 남아서 옛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李春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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