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초대석-정지태 상업은행장

"쓰러져가던 은행 일류로 끌어올려"

'상복이 터졌다'는 말만큼 요즘 정지태(鄭之兌)상업은행장에 어울리는 말은 없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남들 같으면 한번도 타기 어려운 큰 상을 최근 두달 사이에 연거푸 3개나 받았기 때문이다. 지난 10월29일 저축의 날에 현직은행장으로서는 처음으로 은탑산업훈장을 받았으며 지난 3일에는 능률협회로부터 최고경영자상을 수상한데 이어 7일에는 가톨릭실업인회(회장 장덕진)가 주는 '자랑스러운 가톨릭실업인상'을 받았다.

특히 능률협회로부터는 상업은행까지 경영혁신 종합대상을 받아 정행장으로서는 모두 4겹의 경사를 맞은 셈이다.

정행장에게 이처럼 상복이 터지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망해가던 은행을 최고의 은행으로 탈바꿈시켰기 때문이다. 3년 전에만 해도 상업은행은 부실과 금융사고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지금은 6대시중은행중 부실여신은 가장 적으면서 당기 순이익은 가장 많은 알짜은행이다.한국판 클라이슬러의 회생과도 같은 이같은 기적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이 물음에 상업은행 사람들은 한결같이 정행장의 위기처리 능력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만큼 정행장의 경영능력에 대한 상업은행 사람들의 믿음은 절대적이다.

그래서 상업은행내에서는 내년 2월로 두번째 임기가 끝나는 정행장의 연임을 의심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내년에 다시 행장으로 선출될 경우 정행장은 금융계 최초로 3연임하는 행장으로 기록되게 된다.

그는 상업은행이 말 그대로 총체적 위기에 몰려 있던 지난 92년말에 은행장에 올랐다. 당시 공식직함은 전무이사 겸 은행장 직무대행. 이희도 명동지점장이 8백억원대의 CD를 불법유통시키다가92년 11월 자살한 이른바'명동지점 CD사건'의 여파로 김추규 당시 행장과 전무 감사 등 최고경영진이 모두 옷을 벗게 됨에따라 갑자기 은행장을 맡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이철희.장영자 어음사기에 말려든 공영토건의 부도, 명성사건, 중동진출 건설회사의 부실화등 연이은 금융사고와 부실여신으로 이미 골병이 들대로 들어 있었던 상업은행을 망하기 일보 직전의 궁지로 몰아 넣었다.

정행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 상업은행에는 사고은행, 부실은행, 특융은행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습니다. 80년대부터90년대 초반까지 터진 각종 금융사고에는 안 끼이는 데가 없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경영수지악화는 물론이거니와 임직원들의 사기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도 안된다는 패배의식이 만연했고 책임감도 희박해지고 사고의 재발 가능성에도둔감해지는 등 와해 직전의 징후군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업친데 덥친격으로 정행장이 취임한지 반년도 못돼 거래업체인 한양의 부도사건이 터졌다. 이로인해 상업은행이 입게된 손실은 6천억원. 이제 시중에선"상업은행은 끝났다", "머지 않아 망한다"는 소리가 공공연히 나돌기 시작했다.

임직원들도 이러한 소문을 소문으로만 받아 들이지 않았다. 누가 봐도 망할 가능성은 충분해 보였기 때문이다.

'사고 제보제' 도입

정행장은 당장 경영정상화 계획을 마련했다. 상은증권 등 자회사를 매각하고 인원을 줄여 97년까지 부실규모를 정상수준으로 되 돌리겠다는 내용의 자구계획을 은행감독원에 제출하는 한편 임직원의 의식개혁과 금융사고의 사전 차단을 위한'사고제보제' 등 내부의 적을 없애기 위한 혁신적인 조치들을 도입했다.

이중 정행장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이 의식개혁이다.

이를 위해 정행장은 주말을 이용해 전국의 각 지점을 돌면서 아랫사람들과 심지어는 그들의 부인들과도 대화를 나누었다. 이렇게 하면서 마신 소주가 6백여병에 이른다고 한다."우리은행은 조직원이 변화하지 않으면 정말로 망할 수 있는 상황에 와있다. 윗사람 눈치보지 말로 주어진 권한과 규정대로 일을 처리해 달라. 윗사람의 부당한 지시, 특히 부당 대출지시는 절대로 따르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러면서 정행장은 자신부터 대출청탁을 배제, 직원들이 업무를 원칙대로 처리할 수 있도록 바람막이 역할을 했다. 특히 외부의 대출압력은 철저히 막아주었다.

정행장은 이 과정에서 직원들에게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직원들과 대화하면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내가 취할 수 있는 길은 두가지가 있다. 적당히 즐기면서 주어진 임기만 채우는 것이 하나요, 조직의 회생을 위해 스스로 괴로운 길을 걷는 것이 다른 하나다. 나는 두번째 길을 택했다. 그런데 나를 따라주지 않으면 나도 전자를 택하겠다고 말입니다"

직원들의 의식개혁 작업과 병행해 정행장은 '사고 제보제'라는 독특한 제도를 도입했다. 주변에사고가 날 낌새가 있으면 익명을 보장할테니 지체없이 고발하라는 것.

"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최고 은행이었던 상업은행이 망해가는 은행으로 전락하게 된 가장 큰이유는 금융사고와 부실여신입니다. 이를 막지 않고는 은행을 살릴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은행업무의 특성상 사고 가능성은 누구나 감지할 수 있으나 사고가 터지게 되는 이유는 이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제도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행장의 지론이다.

그래서 정행장은 이 제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다듬었다.

제보 채널을 검사실,인사부, 감찰실 등으로 다양화하고 제보자는 철저히 보호하며 제보 방법도 음성녹음, 사서함, 팩시밀리 등으로 다기화했다. 특히 음성녹음의 경우 24시간 녹음이 되도록 하는한편 접수된 정보는 자신에게 바로 전달되도록 직보 체제를 구축했다.

처음에는 직원들간에 불신풍토를 조장한다는 비판에 부딪히긴 했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시행이후 한건의 사고도 없었고 단 한건의 허위제보도 없었다.

정행장이 앞서고 직원들이 뒤에서 밀면서 상업은행은 놀라보게 달라지기 시작했다.93년 7천6백3억원이던 부실여신의 규모가 올 상반기에는 5분의 1수준인 1천5백71억원으로 줄었다. 같은해 73억원에 불과했던 당기순이익도 올 상반기에는 7백93억원으로 11배가 늘어 6대 시중은행중 1위를 기록했다. 6천6백37억원에 달했던 한은특융도 지금은 전혀 없다. 전에는 배당도 못했으나 94년에 2%%,지난해에는 3%%를 하게 될만큼 사정이 여유로워 졌다.

경영의 요체는 사람관리

이러한 놀라운 경영수진 개선으로 상업은행은 은행감독원의 경영평가에서 94년 AA, 95년에는 A를 받기도 했다. 93년 이전에는 계속 C를 면치 못했던 상업은행이었다. 망해 가던 은행이 2년반만에 최고의 은행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이 따랐다. 무엇보다 큰 것이 1천5백명의 인원감축. 가슴아픈 일이었지만 조직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 정행장의 회고이다.

"이들의 희생을 가장 가슴 아픈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살신성인의 심정으로 은행살리기에동참해 준 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의 상업은행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꼴찌은행을 일등은행으로 바꿔 놓는 대단한 경영능력을 발휘한 정행장이지만 그의 경영철학은 의외로 평범하다. 사람관리가 경영의 시작이자 끝이라는 것.

"경영의 요체는 사람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있습니다. 리더가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아랫사람이움직여 주지 않으면 그 조직은 가망없습니다. 주어진 자리에서 윗사람 눈치 안보고 자기책임 하에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은행경영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그는 또 독실한 가톨릭 신자답게 최고경영자를 성직자에 비유한다. 최고경영자는 성직자처럼 진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직자가 강론을 하면서 다른 사람이 써준 강론원고를 읽기만 한다면 그 강론이 교우들의 가슴에 와 닿겠습니까. 최고경영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조직과 조직원에 대한 사랑이 밑받침되지 않고는 아무리 거창한 이야기를 해도 조직원은 따라주지 않습니다. 조직원은 최고경영자가 가슴으로 이야기하는 것인지 입으로만 이야기하는 것인지 단박에 알지요"

그래서 정행장은 자신의 경영개선 노력에 임직원들이 동참해 준 것도 바로 어떻게든 은행을 살려보겠다는 자신의 충정을 아랫사람들이 알아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행장의 성격은 매우 꼼꼼하다. 그가 항상 지니고 다니는 수첩에는 입행 이후 거쳐온 부서와 발령일자, 재직기간, 주요 처리업무 등이 빽빽이 적혀있다. 꼼꼼하다 못해 좀스럽다 할 정도다. 그만큼 그는 대충대충을 싫어한다.

이 때문에 그는 '총론에 강하지만 각론에는 약한 허장성세형', '계획은 거창한데 결과는 안나오는용두사미형', '문제가 생기면 자신의 업무이면서도 잘 모르겠다며 발을 빼는 면피형' 직원들을 가장 싫어한다. 이 모두 자기업무를 꼼꼼하게 챙기지 못하는 유형들이기 때문이다. 상업은행 안팎에서는 이같은 정행장의 성격이 경영 정상화의 밑거름이 됐다는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그래서 상업은행 사람들은 지금도 대출계획을 보고하면서 정행장의"자신있어"라는 물음에 확고하게 "예"라고 대답할 자신이 없으면 아예 결재를 올리지 않는다.

정행장은 지난 93년 6월부터 시작한 경영정상화계획 5개년계획이 2년반만에 성공적으로 마무리됨에 따라 내년부터는 2단계 경영전략으로 일등은행 만들기에 나설 계획이다. 은행이 고객에게한발 더 가까이 다가서도록 고객중심의 수평조직으로 만들고 전산체제를 혁신, 국내에서 가장 편리한 은행으로 만든다는 것.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남은 일은 경영정상화에 따른 직원들의 이완된 긴장감을 다시 다잡는 것이라는 정행장은"앞으로도 경영혁신에 박차를 가해 오는 2001년까지 세계 50위권 은행에 진입하겠다"는 다부진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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