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근대금융제도가 최초로 도입된 것은 지금부터 1백19년전인 1878년. 대구경북지역에는92년전인 1905년이다. 지역 근대금융은 일제하 대구은행(지금의 대구은행과는 별개임) 시대를 거쳐 30년전인 지난67년 현재의 대구은행이 창설됨으로써 본격 지방금융시대가 개막됐다. 대구은행30주년을 맞아 1세기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지역금융 변천사를 조명해본다.
우리나라에 선보인 최초의 근대식 금융기관은 1878년(고종13년) 부산에 설치된 일본의 제일은행부산지점이다. 한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이 체결된 1876년으로부터 2년뒤. 일본과 서구열강의 조선반도 강점야욕이 노골화되기 시작하면서 경제적 수탈의 한 방편으로 근대 금융제도가 도입된것이다.
개항이후 거류일본인수가 증가하고 일본인들의 상업적 진출이 활발해지자 일본은 각개항장에 자국 금융점포망을 확충한다. 부산지점에 이어 1880년 원산, 1883년 인천에 제일은행 출장소가 설치되고 1890년에는 십팔(十八)은행 인천지점, 1892년에는 오십팔(五十八)은행이 각지에 지점망을 설치했다.
1909년 구한국은행이 설립될때까지 제일은행 경성지점(1888년 설립)이 조선총지점으로 승격돼 각개항장에서 세관업무를 담당했을뿐 아니라 은행권 발행의 특권을 가지고 국고금을 취급함에 따라사실상 조선의 중앙은행 기능을 발휘했다.
이무렵 조선측에서도 근대적 금융기관을 창설해 국내 상공업자를 보호육성하려는 움직임이 태동,1894년이후 조선은행, 한흥은행, 제국은행등이 설립됐으나 대부분 경영난으로 1년도 못가 폐점되고 말았다.
그후 1897년 한성은행(현재의 조흥은행 전신)이 설립됐으며 1899년에는 대한천일은행이, 1906년에는 한일은행이 설립됐다.
또 1906년 3월에는 농공은행조례가 제정돼 같은해 8월 한성, 대구, 평양, 전주에 4개의 농공은행이 설립됐고, 후에 7개지역에 농공은행이 추가로 개설됐다.
같은 1906년에 일본흥업은행 경성지점이 설치됐고 1907년 5월에는 정부의 지방금융조합 규칙이발포돼 지방금융조합시대가 개막됐다. 또 1년뒤인 1908년에는 악명높은 동양척식회사가 들어섰다.한편 경북도내 최초의 근대식 금융기관은 1905년 6월 개설된 일본제일은행 대구지점이다. 그다음해 8월에는 농공은행조례에 따라 대구농공은행이 창립됐다. 이 두은행은 한일합방때까지 대구를중심한 지역일원에서 금융업무를 전담하다시피 했다.
제일은행대구지점은 1909년 10월 대한제국의 한국은행 창립과 동시에 한국은행에 인계됐다. 또합방뒤인 1911년에는 조선은행대구지점으로 전환됐다. 조선은행은 해방후 1950년 현재의 한국은행이 창설될때까지 그대로 존속된다.
1906년 창설된 대구농공은행은 1908년 8월 진주농공은행을 통합해 경상농공은행으로 바뀐뒤 경남북을 영업구역으로 농공업자에대한 산업자금 대출과 공공단체에대한 무담보대출을 주로 취급하다1918년 조선식산은행의 설립과 동시에 흡수돼 해방전까지 식산은행 지점으로 존속한다. 대구농공은행은 대구에 본점을 두고있어 지방은행의 성격을 띠고있지만 조례에 의거, 전국주요도시에 설립된것이며 설립목적이 특수한데다 조선식산은행의 모체가 됐으므로 순수지방은행의 범주에 넣기에는 문제가 있다.
경상농공은행은 1918년 조선식산은행이 전국의 한호(서울), 평안(평양), 경상(대구), 전주, 광주, 함경(원산)등 6개농공은행을 통합, 출범함에 따라 식산은행대구지점으로 전환됐다. 농공은행의 이같은 일련의 개편은 일제의 조선수탈을 위한 정지작업이 완성됐음을 의미한다.
지방금융을 위해 농공은행이 설립되긴 했으나 대부분의 영세민은 혜택권밖에 밀려나있어 지방소농민의 금융지원을 강화하고 농공발전을 촉진시키기위해 지방금융조합이 설립됐다. 1907년 전국10개조합중 경북에는 상주, 경주, 성주등 3개소에 금융조합이 설치됐다.
일제시대 대구지역 최초의 지방은행은 1912년 9월 일본인들에 의해 설립된 선남상업은행이다. 또일본계 은행에 대응, 1년뒤인 1913년 7월 최초의 민족자본 지역은행인 대구은행이 설립된다. 대구은행의 취체역은 정재학, 이일우, 이종면, 장길상, 최준, 판본준자(坂本俊資), 감사역은 이병학, 배상락등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당시 대구, 경주, 칠곡, 성주등지를 본거지로 하는 경북 제1의 양반지주층이었다.
대구은행은 1928년 구포은행이 개칭한 경남은행을 합병, 경상합동은행이 됐다. 또 1941년에는 은행령 개정에 따라 한성은행에 흡수합병됐다.
현재의 조흥은행으로 맥이 이어지는 한성은행 대구지점은 1920년 2월 문을 열었으며 4월에는 경일은행이, 또 8월에는 경상공립은행이 잇따라 창립됐다.
1920년 5월 영업을 개시한 경일은행은 표면상 민족자본에 의해 설립됐지만 이면에는 도내 지주세력을 양분해 대립시키려는 일제의 흉계가 도사려있었다. 즉 대구은행이 일본인중심의 선남은행에반발해 설립된 것이라면 경일은행은 대구은행에 대응하기위해 설립된 것으로 볼수있다.경일은행은 1930년 일본인에 의해 설립된 경상공립은행을 합병한다. 민족자본계인 경일은행이 일본계 은행을 합병했다는 기쁨도 잠시. 합병후 불과 1년도 못가 조선총독부와 조선은행은 유무형의 압력을 가해 경일은행 중역진을 모두 일본인으로 바꾸게 된다. 그후 1933년 12월 일본계열의선남은행은 경일은행을 흡수, 상호를 대구상공은행으로 바꾸게 된다.
1941년 대구상공은행은 일제의 지방은행 정비정책에 따라 조선상업은행(현재의 한국상업은행전신)에 영업권을 양도하게 된다. 또 1937년 9월에는 조선저축은행(현재의 제일은행전신) 대구지점이 개설됐다. 1929년 조선저축은행령에 의거, 영세서민층의 금융을 지원하기위해 설립된 특수은행인 저축은행은 포항, 김천, 상주, 안동에 대리점을 개설, 해방당시까지 운영했다.〈池國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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