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시론-졸부의식을 넘어

--김영민 〈전주한일신학대교수·철학〉--

계획과 구상에, 전망과 청사진에 분주한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띄니 또 한해가 밝았나 보다. 사관(史觀)에 상관없이, 무릇 역사란 열고 닫음이 없는 흐름이다. 그러니 앞날을 전망하는 생각도 지나온 날들의 뒷받침이 있어야 제대로 방향이 잡히고 힘이 생긴다. 이른바, 온고지신의 지혜인 것이다. 역사에서 나온 것은 대체로 낡고 묵은 것이어서 참신하고 재빠른 정보는 되지 못해도 더러삶과 사회를 운용하는 큰 지혜에 이르는 법이다.

*'빠름'에 열광하는 시대

그러나 지금은 '오래된 깊이'보다는 '생생한 빠르기'에 열광하는 시대가 아닌가. 템포와 데이터의시대, 통계와 정보의 시대, 그러므로 역사를 헤집어서 생각의 깊이를 구하려는 사람은 오히려 뒤처지는 느낌이다. 정보의 유통망을 따라가면 되는 세상에서 구태여 지혜의 깊이를 구하려는 태도는 시류를 외면하는 딸각발이 선비의 구태(舊態)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너나없이 피상적인 교양이 과잉한 처지에서 누가 애써서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흉내를 낼 것인가. 그러니 철학이 처세술로 둔갑하여 상략의 하수인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대학 현장에 몸담고 있는 이들이 인문교육의 위기를 체감하는 것도 필경은 비슷한 성격의 현상이다. 정부나 학생이나 처세와 일차적 실용을 도모할 수 있는 과목에만 다들 목을 매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된 한글로 편지 한 장 쓸수없고 제나라 역사와 그 문화전통에 대해서 단 5분간도 정연히 말할 수 없는 대학생들이 영어와 전산에만 코를 박고 이른바 '세계화'의 기수로 조련되고있는 것이다.

*범람하는 근대화 '거품'

무엇이 문제일까? 사람살이의 터전에서 말끔한 단답이야 없겠지만, 간략히 역사가 망각되어간다는 사실이 문제의 핵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실수의 역사, 자생적이며 주체적인 근대화의 기회를놓쳐버린 역사를 잊어간다는 사실을 다시 지적해야만 한다.

가령, 1645년, 주자학적 명분주의를 벗어나 당시의 동북아 현실정세를 제대로 파악하고 또 동서문화교류의 경험과 소신, 그리고 구체적 전망을 지닌 조선의 세자 소현(昭顯)이 의문의 죽음을 당함으로써 조선은 자율적이며 내실있는 근대화의 도정에 오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다. 17세기 이후 다산 정약용 등이 이룩한 실학의 성과를 창의적으로 계승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또 얼마나 아쉬운 실수였던가. 개항 이후 합방까지의 30년의 세월도 내우외환의 연속이었다. 안으로는 봉건왕조를 근대 민족국가로 탈바꿈시키는데 실패했고, 밖으로는 외세의 침탈로 인해 민족의 주체적 자존이 송두리째 훼실되고 말았다. 그리고 마침내 왕조의 비참한 몰락과 식민지의 경험 속에서 절맥의 수모를 당하고 만다. 해방 이후의 사정도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타율과 상처의 역사였던 우리의 근대, 그 아픔 속에서 우리의 정신사적 전통은 절맥되었고, 우리의 터가 삭히고 우리의 역사가 묵힌 이치들을 창의적으로 계승하지 못한 그 텅빈 자리에 허위의식만을 조장할 무수한외래품들만이 거품처럼 범람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 내다본 새해 설계를

문화와 사상에서의 절맥이란 치명적이다. 졸부(猝富)가 가능하지 않은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우리 사회의 겉은 전형적인 졸부의 모습을 하고 있다. 물신주의에 가까운 소비주의, 경박한 실용주의, 기술패권주의, 그리고 문화식민주의, 이 모든 것은 정신문화의 절맥과 파행 위에서 급조한근대화의 부작용이다. 남이 200년에 이룩한 근대화를 반세기도 못되어 이룩한 '눈부신' 그러므로'경박한' 근대화의 결과인 것이다.

새해의 전망과 구상에는 우선 우리속에 스며든 졸부의식부터 몰아내자. 눈부시되 경박한 근대화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긴 안목으로 우리 역사의 희비를 다시 살피고, 바로 그 긴 안목으로 새해를 설계하자.

졸부의식에서 역사의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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