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년 6·25전쟁을 겪고 난 직후 우리나라 자동차는 폐허의 위기를 맞았다. 전쟁전 1만6천대나 되던 자동차는 파손되어 4천여대로 줄어들었고 그나마 고물차로 변해 자동차 교통은 마비상태였다.다행히 미군이 쓰다 버린 군용 폐차들이 쏟아져 나와 우리나라 육로교통은 겨우 숨을 쉬게 됐고60년대 말까지 군용폐차 재생 자동차시대를 맞았다.
트럭이나 버스는 미군의'지엠시'트럭을 개조한 것이었고 자가용 역시 토막내어 불하한 것을 재생시켜 드럼통을 펴서 만든 상자형 차체를 씌워 타고 다녔다.
이 상태에서 1955년 10월 첫 국산자동차 시발은 탄생했다. 서울을지로에서 자동차정비업을 하던최무성씨 3형제가 빈 공터에 천막을 쳐놓고 불하받은 지프의 엔진, 변속기, 차축, 뼈대등을 이용해 만든 것이었다.
자동차가 귀한 시절에 우리 손으로 만든 시발에 대한 긍지는 대단했다.
형편없는 기술과 시설에도 불구하고 시발의 엔진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 장착했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었다.
한대를 만드는데 4개월이 걸렸던 시발은 8만환에 판매됐지만 처음에는 잘 팔리지 않았다.시발은 그러나 그해 10월 열린 산업박람회에서 이승만대통령상을 받은 후 인기가 치솟았다. 공장은 구매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뤘고 차값은 30만환으로 뛰어올랐다.
시발에 대한 수요가 넘치면서 상류층 부녀자들 사이에서는 시발계라는 이상한 투기 붐이 일어났다. 부녀자들은 소위'뺨'을 동원, 한번에 2~3대씩 사다가 프레미엄을 얹어 전매했다. 시발은 1962년까지 2천6백여대를 생산, 우리나라 승용차 부족을 해소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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